미스 데프 아메리카 경염대회에서 일어난 일

여성들이 아름다운 몸매와 교양을 맘껏 자랑하는 경염대회가 많이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미스 코리아, 미스 유니버스, 미스 월드 같은 것은 공중파를 타고 TV를 통해 안방에 중계되기도 한다.


그러면 농인 여성들을 위한 경염대회는 없는가? 한국에서는 아직 없지만 미국에서는 다행히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름하여 ‘미스 데프 아메리카’ 경염대회이다.


친농파라고 알려진 어떤 교수가 참석했다. 미국은 50개 주로 되어 있는 합중국이다. 따라서 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는 50명으로 되어 있다. 각주에서 대표로 선발된 아름다운 농 미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그 교수는 어떤 당혹감이나 의문 같은 것이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 당혹감 내지 의문이 구름처럼 점차 불어나더니 급기야는 옆에 앉아 있던 관객에게 말을 건네기에 이르렀다.


“잘 아시다시피 청인 미인 경염대회를 보면 대표들이 가슴이 몇 인치, 허리가 몇 인치, 히프가 몇 인치, 이렇게 콜라병 같은 곡선미를 자랑하던데 여기 농인 미인들을 보니 이런 기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대표를 보니 허리가 청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고 어떤 대표를 보니 히프가 청인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요.”하고 수화했다.


그 옆에 있던 농인 여성이 약간 아니꼽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농 중심(deaf center)'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 청인을 위한 대회가 아니고 농인을 위한 대회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농이라는 잣대에서 볼 때 청인처럼 가슴이 얼마, 허리가 얼마, 엉덩이가 얼마, 이런 것을 따지지 않아요. 오히려 탈렌트 즉 춤과 수화 노래 같은 예능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이지요.”


그 교수는 뭔가 얻어맞은 표정을 하면서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사과 비슷하게 말해야 했다.


우리에게는 과연 농 중심이나 농 잣대라는 것이 있었는가?

주류 청인 사회에서 청인들의 멸시와 차별에 부대끼며 힘없이 살아가다보니 농 중심이라는 것을 주장할 형편이 못되는 모양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농인에게는 ‘농문화’가 엄연히 존재한다. ‘농문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농 중심이나 농 잣대를 운위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요즘 농인들의 모어(母語)인 수동, 시각 언어를 가리켜 수어(手語)라고 부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수화’라고 불렀던 것을 이제는 ‘수어’라는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97년인가 1998년에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수어교재를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20명 되는 농사회 저명 인사들을 위원으로 모시고 교재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그 때 필자는 한국수화 대신 한국수어라고 책 제목을 달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대부분의 위원들은 ‘수어’라는 단어의 생소함을 들어서 난색을 표명하였다. 어떤 위원은 국어사전에 ‘수어’라는 표제어가 수록되어 있느냐 하면서 반대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많은 저명한 농인 인사들 중에 아직도 농 중심성이 없다는 사실에 비감을 느꼈다.


다행히 젊은 층 중에 농문화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농 중심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다. 그 이유는 농 중심성이 없으면 농인들이 주류 청인 사회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낙오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농청년 감독 박 재현

부산에 사는 어느 젊은 자매가 나에게 데프 미디어가 제작한 농인의, 농인을 위한, 농인에 의한 영화 입장권을 주어서 6월 19일 저녁 친구들과 함께 재일농인교포들을 다룬 영화와 인도를 일주하면서 찍은 인도 농사회의 모습들을 담은 영화를 감상했다.

다큐 형식으로 편집된 영화이고 내가 보기에 아마츄어 냄새가 가시지 않은 영화였지만 다소 서툴더라고 농인과 관련된 영화를 한국 농인이 감독하고 제작한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영화가 끝난 후에 감독 박재현 씨를 짧은 시간에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다소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는 젊은 청년인 박재현 씨는 또박또박 수어로 자신을 소개하였는데 농관련 영화를 촬영 제작한지 5년이 되었다고 한다. 8년이나 미국에 거주한 관계로 이런 숨은 젊은 인재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었지만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의 태도나 말씨에 자신감이 묻어나와 있어서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다큐 형식의 영화이지만 그 영화를 촬영 제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지 직접 당해봐야 알 수 있으리라.


야외에서 오래동안 촬영한 탓인지 까무잡잡한 피부가 인상적인 그는 우리에게 농인 세계와 농문화를 영상을 통해 소개해주고 있어 개인적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 특유의 패기와 의욕이 그의 표정이나 말씨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될 수 있었는데 그 자신의 말마따나 앞으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의 포부가 당차게 느껴져서 앞으로 대성할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영화의 완성도나 구성 면에서 미숙한 부분이 발견되지만 전인미답의 불모지를 처음으로 개척한 그의 모험정신이 가상해서 맘껏 칭찬해주고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나왔다.


좁은 한국 땅에 이런 숨은 농인 재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반갑고 고무적이었으며 이런 아름다운 농청년이 있음으로 한국 농사회의 앞날이 밝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데 인색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이르러서는 총총 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르는 나의 얼굴에 따스하고 흐뭇한 미소가 번져나오게 했다.


‘제발’ 수화에서 본 비합리성(非合理性)

‘제발’이라는 단어는 ‘간절히 바라건대’라는 의미로 ‘간원하다’, ‘부탁하다’, ‘소원하다’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이다. 청인들은 ‘제발’의 의미로 두 손을 싹싹 비는 시늉을 즐겨 사용한다. 두 손을 싹싹 비는 것은 ‘빌거나’, ‘구걸하거나’, ‘기도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제발’은 상대의 굳은 마음이나 고집이 흔들려 바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소원에 가까운 희구이다.


그러면 ‘제발’에 해당되는 수화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더러는 청인들처럼 두 손을 싹싹 빌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은 ‘바르다’처럼 4 지숫자 모양을 한 오른손 검지의 옆 부분을 입에 댔다가 오른쪽으로 스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런 수화는 ‘바르다’ 외에 ‘정상’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제발’이라는 의미가 ‘바르다’나 ‘정상’하고 거리가 있건만 농인들은 이상하게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농인들이 ‘바르다’ 혹은 ‘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수화를 구사함으로 ‘제발’의 뜻을 전달하는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상대의 억지에 가까운 사고를 바로 잡아달라거나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결국 ‘바르다’나 ‘정상’이라는 의미를 띤 ‘제발’ 수화는 상대의 말도 안되고 어처구니 없는 억지나 고집이나 타당하지 않는 사고나 의식을 바로 잡아서 합리성 있게 사고하고 행동해줄 것을 요청하는 제스츄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농인들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이나 의식에는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농인들의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나 의식은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청각장애 자체가 농인들로 하여금 곡해된 사고방식을 고수하게 만든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청각장애가 낳은 여러 가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물 중에 하나는 남들과의 의사소통의 장벽인데 의사소통의 장벽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회성 함양을 저해하기 때문에 올바른 대인 관계 수립하는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청력 상실로 인한 자연스러운 언어 습득의 기회의 소실로 인해 보통 농인들은 비참할 정도의 어휘력 문장력의 빈곤 현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 인해 청인들처럼 책을 많이 읽지 않는 결과가 나타난다. 책을 읽음으로 올바른 판단력, 비판적인 사고능력, 합리적인 의식구조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데 불행히 형편없는 어휘력과 독해 능력 때문에 책을 가까이 하지 않다 보니 합리적인 판단력이나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사고능력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읽지 못한 농인들일 수록 그들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에 억지나 비합리성의 어두운 그림자가 발견되는 것은 하등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농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상대에게 구걸하거나 부탁하거나 애원하는 식의 제스츄어를 쓰는 대신 말도 안되는 이상한 논리에 집착하는 고집이나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을 고쳐서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여 달라는 의미로 “제발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다오.“ 혹은 ”제발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사고해주오.“하는 식으로 ‘바르다’나 ‘정상’이라는 의미의 수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제발’ 수화에는 또 다른 표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9 지숫자 모양을 한 오른손 엄지 손톱을 코 옆에 붙인 후 나머지 손가락을 엄지에 붙이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수화는 ‘뻔뻔스럽다’의 반대 개념으로 쓰이는데 결국 ‘잘못을 인정하거나 시인한다’ 혹은 ‘승복한다’의 의미로 폭넓게 사용될 수 있는 그런 수화인 것이다. ‘제발’이라는 의미의 수화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상해보이지만 상당수의 농인들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농인들이 상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승자의 여유나 아량을 패자에게 보여 달라는 호소 즉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의미로 ‘제발’ 수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청인들처럼 애원하고 부탁하는 것과 유사한 의도를 지닌 수화 표현이지만 농인들의 경우 더욱 저자세의 모습을 보인다는 데서 비굴함이 풍겨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보인다.

일부 농인들의 억지 논리가 많은 농인들을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만들 뿐더러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로 행동해야 하는 모습은 확실히 비극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박 집사의 훈훈한 이야기

일전에 박 집사 부부가 인사차 찾아왔다. 화상을 통해서 몇차례 뵈온 적이 있었지만 직접 만나뵌 것은 작년 어느 교회 부흥회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 반가워서 1시간정도 찻집에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한 것도 부족해서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면서 거의 3시간이나 채팅을 하고 헤어졌다.


물론 화제 중에 교회 문제 그리고 직장 문제, 가정 문제 등 다양하다 보니 자연히 특정인들에 대한 비판도 곁들이게 되었다. 박집사가 나름대로 그들에 대한 실망이나 아쉬움에서 토로한 악의가 없는 비판이었지만 나는 평신도가 보는 안목이 예상보다 날카롭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면서 교역자가 평신도를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는 자성을 갖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 후에 영상전화를 통해서 박 집사가 호출해서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는 며칠 전에 있었던 나와의 대화 중 특정 인물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 마음에 걸려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면서 목사 앞에서 특정 인물들에 대하여 비판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죄했다. 나야 그 특정 인물들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듣다 한쪽 귀로 흘려 버리면 그만이라는 입장이었지만 정작 박 집사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목사 앞에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박 집사가 나에 대해서 비방한 것이 아닌 만큼 나에게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그래도 목사님 앞에 기독교인답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에 목사님께 실망과 심려를 끼친 것 아닌가 싶어 죄송한 마음 가눌 길 없어 이렇게 화상을 통해서 사과를 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나는 웃으며 박 집사님의 믿음이 참 좋다고 칭찬하면서 하나님께서 박 집사님의 본심을 알아주시고 기뻐하시고 복 내려 주실 것이라고 덕담을 주었더니 박 집사가 그제서야 안도하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영상통화가 끝난 후 나는 박 집사의 순수한 믿음에 감복하면서 하나님께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렸다.


교역자들을 만나면 특정 인물들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많이 들어보았을 뿐 아니라 나 자신도 실망의 표시로 이들에 대한 비판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판에 대해서 박 집사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불면의 밤을 보낸 일이 없고 오히려 태평하게 숙면을 취하였다. 분명 예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다. 야고보 장로는 사람의 지체 중 가장 죄를 많이 범하게 하는 것이 입과 혀가 단연 으뜸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교역자들 중에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다른 교역자들에 대해서 비난의 소리를 서슴치 않는 경우가 많다. 명색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그들이 예수의 비판하지 말라는 훈계를 귀담아듣지 않고 입으로(농인들은 손으로 말을 하니까 ‘손으로’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많은 죄를 범한다.


박 집사가 사소해보이기조차 한 남들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과민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한 것을 보면서 나는 신선한 느낌을 얻었다. 현재 한국 농아교회는 교역자들 간의 분열과 반목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환멸을 안겨주고 있다. 화합과 일치의 본을 보여주는데 실패한 교역자들 때문에 많은 뜻있는 교인들은 우려와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나에게 화합과 일치를 위해 큰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집과 교만 때문에 화합과 일치에 인색한 교역자들을 보면서 한국 농아교회의 장래가 암담하다고 비관할 때가 있었지만 박 집사 때문에 나는 “아니다. 박 집사 같은 양심적인 평신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 농아교회의 장래가 암담하지만은 않을 것이다”하고 낙관스럽게 생각을 고쳐먹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의인 10명만 있어도 당시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한국에는 박 집사 같은 믿음이 좋은 분이 10명만 있어도 한국농아교회가 지탱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하면서 감사하고 싶다.


‘보류하다’ 수화에서 본 농인의 심리

‘매듭짓다’라는 말은 ‘매듭’과 ‘짓다’가 합친 합성어다. 매듭은 노, 끈, 실 같은 것을 잡아맨 자리가 불룩하게 나온 자리를 말한다. 그러면 ‘매듭을 짓다’고 할 때 그 뜻은 일을 그 순서대로 한 가지씩 결말을 짓는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매듭을 짓다’는 완결을 의미한다. 끝냈다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the end'요 ’finish'인 것이다.


그런데 수화로 표현할 경우 그 의미가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된다. 수화에도 매듭을 짓는 듯한 시늉의 손짓 표현이 있다. 양손을 각각 엄지와 검지의 끝을 붙인 가운데 마치 끈을 동여매어 묶는 듯한 시늉을 하는데 이것이 수화를 잘 모르는 초보자라도 한 눈에 봐도 영락없이 ‘매듭을 짓다’라는 수화표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사실(寫實)에 가까운 수화이다.


일반인이 그 수화를 처음에 배울 때 “아! ‘매듭을 짓다’라는 수화임에 틀림없다”라고 스스로 단정을 내리고 그 의미를 완결이나 종결쯤으로 해석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딱 알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농인이 누가 봐도 매듭을 짓는 듯한 표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수화를 사용할 때 엉뚱하게 ‘보류하다’라는 의미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말짓다’라는 말과 ‘보류하다’라는 말은 서로 유사한 부분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보류하다’라는 말은 일이나 안건의 결정을 미루어서 머물러둔다는 뜻을 가지기 때문에 결말을 가리키는 ‘매듭짓다’라는 단어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의미를 가진다.


왜 농인들은 매듭을 짓는 시늉의 수화 표현을 결말이 아닌 보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일까? 농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까? 아니면 결단력이 부족한 농인 특유의 성격 탓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우유부단성이라든지 결단력 부족 같은 것은 개인의 성격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지 집단적 현상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성격은 철저히 개성적인 현상이지 신드롬(증후군)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닌 것이다.


농인의 종결을 거부하는 듯한 표현 방식은 수화할 때의 종결어미의 증발에서 역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어로 서술형 종결어미가 있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다’라는 어미이다. 무슨 말을 하든 ‘....다’로 마치고 그 다음에 종지부(점)을 찍으면 문장이 끝났다는 표시인 것이다. 만일 ‘....다’가 나오지 않으면 문장이 완성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문장은 미완성인 채로 아직도 계속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시사함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긴장을 풀지 말고 더 계속 경청하거나 읽을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문법적 규약인 것이다.


그런데 농인의 수화 표현에는 서술형 종결어미가 생략되어 있다. ‘....다’가 빠져 있다는 말이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라고 수화로 표현할 때 ‘나’ 수화와 ‘공부’ 수화와 ‘열심히’ 수화 그리고 ‘한다’ 수화가 동원되지만 유독 ‘...다’라는 종결어미만이 생략되어 있다.


물론 농아학교에서 문장식 수화가 개발되어 ‘....다’라는 종결어미가 오른손바닥을 왼손바닥 위에 부딪친 후에 옆으로 옮겨 놓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연설이나 교육용으로 쓰일 뿐 농인들의 일상 회화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그래서 농인의 수화표현을 보면 마치 엿가락 늘이듯 마침표 없이 계속되는 긴 문장처럼 보여지는 것이다. 통역자의 입장에서 노련한 통역자가 아니면 어디까지 마쳐야 할지 쩔쩔 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농인의 수화표현은 이렇게 종결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무래도 농인들의 불만스러운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농인들은 불만이 많다.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신체적 장애에서 비롯된 생래적 불편과 제약이 욕구 불만을 초래한다는 것은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농이라는 신체적 한계로 인해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항상 소외되어 살아야 하는 아픔을 고려할 때 농인의 사회적 성취도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청각장애로 인해 일반인과의 소통이 잘 안되고 이러한 의사소통의 장벽으로 인해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농인들의 의식 저변에 좌절감과 실망과 욕구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가스가 꽉 찬 헛배와 같아 늘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참다운 만족을 모르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을 감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 불만의 심리가 아쉬움과 미련과 한(恨)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결말이나 완결을 의미하는 ‘매듭짓기’가 농인들에게는 ‘보류’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된 것은 다분히 사회적 책임이 크다. 한국 사회는 장애인들의 복지나 인권 문제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마련하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장애인 사회복지나 인권문제에 괄목할만한 진전이 이루어지게 되면 미련이나 한이나 아쉬움 같은 것이 농인들의 의식 가운데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퇴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인들은 비로소 ‘매듭짓다’라는 표현을 ‘보류’의 의미로 해석하는 억지(?)에서 벗어나 ‘결말’이라고 제대로 해석하는 정도(正道)로 돌아올 수 있게 될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매듭짓다’를 ‘보류’의 의미로 억지 해석하는 만용을 부린 농인이니만큼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지 않는 오기의 표시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보류한다는 것은 종결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순순히 결과에 승복하고 포기하기를 거절한다는 제스츄어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얼마전 한국농아인협회 변승일 회장 직무 가처분 소송이 인정되어 결국 변승일 회장은 도중하차하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선거 과정에서 하자가 발견되어 이를 문제 삼은 반대측의 집요한 송사가 가져온 참담한 결말이다. ‘보류’ 수화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승복을 거부하는 의식구조, 이것이 과연 농사회를 위해서 좋은 것인지 아니면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인지 나도 헷갈린다.


한국농아인협회는 무사한가?

결국 한국농아인협회 변승일 회장에 대한 회장직 가처분 소송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져 협회는 이제 당분간은 김이호 씨가 회장 대행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변승일 회장이 직무를 중단할 만큼 회장 선거 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는지 선거 현장에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다. 어쨌든 법원에서 가처분 신청을 한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으니 회장 선거 과정에서 하자가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협회가 어떻게 되어갈 지 모르지만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보면서 문득 한국농아인협회의 암흑시대가 떠올라서 불안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한국농아인협회는 정확히 1946년에 창립을 보았다. 그 때는 ‘조선농아협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협회는 순조로운 출범을 계속하지 못하고 임원들 간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그 후에는 '대한농아협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조직을 일신하고 새출발을 다짐했으나 불행히 6.25를 맞아 협회는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휴전후에 협회는 재건의 기치를 들고 회칙을 새로 개정하고 당시 유력한 농인 인사들을 협회 임원 및 이사진에 배치하면서 외형상 매우 강력한 조직으로 재탄생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내부 갈등이 도지면서 회장이 자꾸 바뀌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1961년 5.16 혁명이 일어나면서 박정희 군사정부는 모든 사회 단체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 농아협회도 해산의 태풍에 날려 치욕적인 해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농아협회 역사에서 암흑시대의 서막을 고한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그 후 한국농아협회의 재건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결코 농아협회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약 20년 동안 농아협회는 기나긴 동면에 들어가야 했다. 아마 박정희 군사정부는 농아협회의 난맥상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어서 협회에 대해서 강한 불신이 있었는지 모른다.


한국농아협회가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김기창 화백 덕분이었다. 그 당시 한국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던 김기창 화백의 유명세 덕분에 1980년에 전두환 정부는 한국농아협회를 공식 단체로 인정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김기창 화백이 16년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협회는 성장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사회복지법인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가 설립되면서 한국농아협회는 차츰 그 기세에 눌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인사들이 안세준 후보를 중심으로 뭉쳐서 선거 혁명을 일으켜 마침내 청음회관에서 벗어나 교육대학 근처에서 사무실을 내고 살림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농아인협회의 눈부신 발전을 가능케 한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다.


안세준 회장에 이어 주신기 회장 그리고 변승일 회장에 이르기까지 순풍에 돛 달듯 순조롭게 항해를 하다가 이번에 변승일 회장 직무 가처분 소송에 걸려 변 회장이 도중하차하는 사변이 발생했다. 회장 선거 과정에서 문제가 있어서 법원에서 소송을 낸 원고의 손을 들어준 이상 내가 왈가왈부할 입장이 못된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다시 선거 과정에서의 허점을 빌미로 해서 법정에 당선 무효를 청원하는 일이 다시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농아인협회는 내년이면 창립 65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65년이면 이미 회갑을 지난 노년기인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듬직한 나이인 것이다. 더 이상 유치한 모습, 어수룩한 모습, 허술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만일 협회가 계속 갈등과 분열의 추한 모습을 연출한다면 일반 사회와 정부는 이러한 모습에 환멸과 실망을 느껴 더 이상 협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를 거부하게 되는 날 박정희 정부 때처럼 협회가 20년간 그 존재를 부정 당하는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멋’ 수화에 나타난 진정한 의미

우선 사전적 정의를 보면 ‘멋’은 “차림새·행동·생김새 등이 세련되고 아름다움” 혹은 “맵시가 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멋’은 형식미를 가리킨다는데 아무런 이의를 달 수가 없을 것이다. 이어녕은 ‘멋’을 ‘스타일’이란 말과 비교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정반대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스타일’은 격식화된 일정한 법칙 그리고 특정한 양식과 질서를 의미하지만 ‘멋’은 오히려 일정한 격식, 특정한 경향, 그리고 일반적인 질서와 그 규칙을 깨뜨리게 될 때 생긴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멋없다’는 말은 ‘싱겁다’는 뜻이며 ‘싱겁다’는 것은 규칙이나 인습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무미건조함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농인들이 사용하는 ‘멋’이라는 수화를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검지 끝을 코에 댔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그 검지를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구불구불 흔드는 것으로 표현되는 ‘멋’ 수화는 한 눈에 격식 파괴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멋부린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단추를 다 잠그지 않고 하나쯤 풀어놓으면 멋이 있다고 한다. 요즘 젊은 남성들이 귀걸이를 하는 것이 눈에 띄는데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나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정작 귀걸이를 한 그 당사자는 이를 멋있는 것으로 보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눈치다. 적어도 ‘멋’이라는 수화가 주는 정의를 보면 규칙에서 어긋나고 통일적인 양식을 슬쩍 무시해버릴 때 ‘멋’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멋’은 획일적인데서 변화를 찾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농인 중에 멋있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일까? 옷차림이 세련되고 맵시 있게 입는 농인을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아마 농인들의 여유롭지 못한 경제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일부 여성 중에 멋있게 차려 입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겉으로 나타난 외모나 차림새 등에 관심이 없다.


내가 농인들 중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들라면 바로 생각이 독특한 독창적인 사람이다. 수화를 보면 검지를 구불구불하게 폈다 구부렸다 하면서 앞으로 내미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획일성이나 격식이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지식함을 벗어버리는 것이 농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멋’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농인들이 종사하는 직업을 보면 양복, 양화, 목공이 대세였다. 이런 직업 말고 다른 것을 감히 도전하면 큰 일이 나는 줄 알았을 정도로 우리 선배들은 단순하고 소심한 데가 있었다. 선배들 중에 더러는 경제적 여유로 인해서 복장을 통해서 멋을 부릴 줄 알았지만 불행히 그들의 머리는 독창성이 부족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멋진’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요즘 기술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양복, 양화 같은 직업은 사양의 길을 걷고 있는 대신 건축업이나 가구 제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아니면 호떡 장사를 하거나 암웨이, 뉴스킨, 같은 다단계 판매업에 종사하는 농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직업들은 전혀 새로운 느낌이 없고 오히려 식상함을 자아내게 하는 구태의연한 직업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 뭔가 새로운 느낌을 주는 직업에 종사하는 농인이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내가 진정 찾고자 하는 멋있는 사람이란 과거에 선배들이 감히 개척해보지 못한 전대미답의 새로운 직업에 도전한 사람이다. 창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태의연을 과감히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도전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길을 개척하여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평범함을 거부하는 독창적인 사람 즉 내가 말하는 ‘멋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8년 전에 나는 한국 장로교 사상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농인이 되었다. 그 때 많은 교인들은 장로교 최초의 농인 목사의 탄생에 열광했다.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멋진' 경사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이제는 목사 안수를 받은 농인의 수가 장로교, 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침례교 등등 모두 합치면 족히 100명을 넘어섰을 것이다. 목사 수가 많다는 것을 그리 나쁘게 볼 필요가 없지만 해외 선교사로 사역하는 농인 목사 수가 극소수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불만스럽다. 나 자신 8년간 미국에서 미국 농인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특이한 경력을 쌓은 바가 있어서 해외 선교사의 애환이나 고충을 누구보다 좀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고 자부한다. 언어나 문화가 다른 외국에 가서 선교사로 일한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노력과 인내와 수고를 요구한다. 특히 외국에 가서 그 흔한 이방인 기피증 같은 핸디캡을 극복하고 끝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신뢰와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뛰어난 인격이나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냥 수십 명이나 되는 작은 농아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무사안일과 매너리즘에 빠진 농인 목사보다는 뭔가 획기적이고 독특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농인 공동체를 섬기는 목사를 나는 멋있는 목사라고 치켜세우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태백에서 기도원을 설립하고 신학교를 운영하고 십자가 목걸이를 제작하기 위해 작은 공장을 설립하는 등 다재다능을 과시했던 최호식 목사를 나는 보기 드물게 멋있는 목사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지금 아내와 함께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 사역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요즘 젊은 농인들 중에 특이한 직업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어 그야말로 ‘멋들어진’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내 동창으로 일찍이 목축업에 뛰어들었으며 후에는 한국 최초의 보험 설계사로 활약하다가 이제는 서울농아복지관 관장으로 수고하고 있는 이대섭씨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 그는 보통 농인들이 밟아보지 못한 길을 과감히 도전해서 보란 듯이 성공함으로 많은 농인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변호사, 치과의사, 과학자, 회계사, 등등 보통 농인들이 감히 도전해보지 못한 뛰어난 실력이 요구되는 고등 전문 직업에 도전해서 ‘멋지게’ 성공하는 농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나는 바라고 있으며 진정 ‘멋’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도도'의 비극

제목을 보고 ‘도도’라는 이름을 가진 남미나 브라질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의 제목쯤으로 안다면 큰 코 다친다. 여기서는 ‘도도’라는 이름을 가진 외국 어린이와 전혀 무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아는 대로 한국어는 조사의 활용을 문법적 특징으로 하고 있는 언어다. 격조사를 보면 주격조사, 목적격조사, 보격조사, 서술격조사, 관형격조사, 부사격조사, 호격조사 등을 들 수 있으며 접속조사가 있을 뿐 아니라 보조사도 있어 조사만 해도 스무개를 족히 넘는다. 스무개 넘는 많은 조사들이 명사나 대명사 같은 체언 뒤에 붙어서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거나 의미를 추가하는 의존 형태소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조사를 생략하면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나타낼 수 없게 되어 있어서 한국어 문법에서 조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서울농아학교 초등부 시절에 국어를 공부할 때 무슨 조사를 어떤 경우에 붙여야 하는지 헷갈려서 조사하면 괜히 짜증이 나고 마냥 귀찮았던 기억이 남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수어에는 조사의 활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는다. 아니 조사 활용을 과감히 생략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수어에 조사 표시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수어는 문법적으로 미흡하고 열등한 언어로 인식한 적이 있었지만 나중에 영어나 유럽 언어 같은 경우 조사의 활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조사의 활용이 생략된 한국수어가 결코 그 때문에 열등한 언어로 평가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법을 보면 예외가 참 많이 나온다. 세계 공용어로 우뚝 서 있는 영어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예외가 있어서 영어를 익히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왔는지 모른다. 한국수어도 마찬가지로 문법적인 예외가 있다. 보통 자주 많이 사용되는 조사 중 대표격인 주격조사 ‘이’, ‘가’나 목적격조사 ‘을’, ‘를’ 따위를 그냥 무시하고 사용하지 않는 강심장을 지닌 한국 농인들이지만 이상하게도 ‘역시’를 의미하는 보조사인 ‘도’만은 친절하게 지문자로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너 마찬가지다.” “나 하겠다.” 등등. 이렇게 지문자로 간단히 ‘도’를 표시하는 정성을 보일 수 있다면 기왕이면 주격조사나 목적격조사 따위를 표시하기 위해 지화함 직 하건마는 약속이나 한 듯 농인들은 주격조사나 목적격조사 따위는 귀찮은 존재라도 되기나 한 양 표시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단, 예외가 있는데 장로교 농인 목사들 사이에 축도를 할 때 “.....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부분에서는 이상하게도 ‘이’를 지문자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 쓴 웃음이 나게 한다. 구태여 ‘이’를 지문자로 표시하지 않아도 농인 교인들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도’는 역시를 의미하는 보조사라고 이미 설명했다. 조사 중에서 대표격인 주격조사나 목적격조사를 쓰지 않아도 ‘도’만은 이상할 정도로 지문자로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보면 농인들에게 있어서 ‘역시’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나는 여기서 농인들의 독특성의 기피 내지는 독특성에 대한 공포 의식을 어렴풋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농인들은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유별남을 두려워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독창성이 없다는 것은 모험 정신이 결핍하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전에는 대학하면 미술대학이 농아학교를 나온 농학생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이 되었다가 필자가 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많은 농인들이 너도 나도 신학교 입학 러쉬를 이루었다. 요즘 많은 농청년들이 선호하는 대학이 있다면 단연 사회복지 계통이 으뜸이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이태원에서 노점상을 하는 농인들이 수십명이나 되었다가 경기가 부진하니까 대신 각광을 받은 것은 쥐포를 구워 파는 것이었다. 이제는 호떡 장사가 농인들 사이에 가장 수지 맞는 소규모 사업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암웨이, 뉴스킨 같은 다단계 사업에 뛰어든 농인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많은 농인들은 매사에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독창성이나 독특성을 발휘할 여지를 두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신감의 부족 탓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청각 장애 탓으로 청인들에 비해 엄청난 핸디캡을 감수해야 하는 농인들 입장에서 평범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고 남들과 차별성을 둘 수 있도록 독특성이나 독창성을 발휘하려 해도 실패할까 두려워서 감히 전인미답의 모험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튀지 않고 평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무리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속내를 ‘도’라는 조사를 통해서 은연중에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한 가지 한국어 문법상 특징은 동사나 형용사 같은 용언에 다양한 어미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동사나 형용사의 어미를 의미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문법적 특징을 가진다. ‘-고,’ ‘-으며,’ ‘-어서,’ ‘-므로,’ ‘-도록,’ ‘-다가’ 등등 연결어미들이 있어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수어에는 그 복잡한 연결어미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다. 연결어미들 중에 수화로 표현이 가능한 것은 수화로 표현하는데 가령 ‘-다가’를 ‘중단’이라는 수화로, ‘-할수록’은 ‘더욱’이라는 수화로, ‘-므로’는 ‘때문에’라는 수화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런데 수화로 표현이 가능한 연결어미들과 달리 오직 지문자로 표현되는 연결어미가 있으니 바로 다름이 아닌 양보를 의미하는 ‘-도’이다. 농인들은 이런 양보를 의미하는 연결어미 ‘-’를 지문자로 표현하기를 즐겨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도’는 양보를 의미하는 연결어미이기 때문에 농인들은 이런 어미를 부정적인 양보의 뜻으로 구사하기를 즐겨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 소용없더라.” “수고 많이 해 결국은 헛수고일 뿐이다.” “애써 남는 것이 없다.” “무엇을 해봐 마찬가지다.” 등등 다분히 부정적인 결론을 짓는데 ‘-’라는 연결어미를 약방의 감초처럼 즐겨 활용하는 비상한 재주를 농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보통 농인들의 문장력은 비참할 정도로 저조하고 농인들의 문장을 보면 문법적 오류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양보 연결어미 ‘-도’만큼은 거의 정확하게 사용하는 농인들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소름이 날 지경이다.


이렇게 양보 연결어미 ‘-도’를 정확하게 활용할 줄 아는 농인들이지만 유감스럽게 부정적인 결말을 위해 지금도 ‘-도’를 지문자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기를 죽이는 표현에 다름이 아니다. 위에서 몇가지 예문을 들어보았지만 한결같이 ‘-도’ 다음에 오는 ‘소용없다,’ ‘헛수고이다,’ ‘남는 것이 없다,’ ‘마찬가지다,’ 따위의 표현은 좀 나은 편이고 대개는 ‘안된다,’ ‘어렵다’등과 같은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문구가 빈번하게 나오기 때문에 결국 농인들이 부정적인 결말을 강조하기 위해 ‘-도’를 지문자로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농인들과 수어로 대화하는 동안 상대방이 양보 연결어미 ‘-도’를 지문자로 표시하는 것을 보면 그 다음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의 표현에는 어떤 정석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많은 조사들을 제쳐놓고 역시를 의미하는 조사 ‘도’와 수화로 표현이 가능한 여러 가지 연결어미들과 달리 양보를 의미하는 연결어미 ‘-도’를 예외적으로 지문자로 사용하기를 즐겨하는 농인들의 이상한 말투에서, 특히 이들의 사용 방식이 다소 건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에서 나는 ‘도도’의 비극을 발견한 것이다.


알고 계셨나요?(2)

미국 메이저 리그 프로야구의 연륜은 100년을 훨씬 상회할 정도로 오래 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야구의 실력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고 세계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할 정도로 많이 발전해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 경기들과 달리 템포가 다소 느려서 박진감이 좀 덜하다는 평을 듣는다. 축구와 농구는 쉬지 못하고 계속 달음질을 해야 하는데 비해서 야구는 간간이 달음질하지 않고 서서 쉴 수 있는 여유를 자랑한다.


이렇게 느린 템포로 진행되는 경기라 초보자 입장에서는 아마 지루해보일 수 있지만 그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주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응원단의 신나는 율동과 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스트라이크나 볼이나 아웃을 외칠 때의 손동작이다. 심판마다 손동작이 다소 틀리지만 스트라이크나 아웃을 부를 때 그냥 음성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손동작으로 하는 것을 보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거기에는 사연이 숨어있는 것이다.


오래전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귀가 안들리는 농인 선수들이 미국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선수는 바로 윌리암 “벙어리” 호이였다. 그가 타석에 서서 투수가 던지는 공을 노려보면서 배트를 단단히 쥐고 공을 강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투수가 던진 공이 볼인지 아니면 스트라이크인지 심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호이 선수 입장에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심판에게 자신이 듣지 못하는 농인인 관계로 심판이 스트라이크나 볼을 외쳐도 못 듣기 때문에 선수 입장에서 억울하고 불리하다고 설명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손동작을 해줄 것을 요청하니 심판들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그 때부터 ‘벙어리’ 호이 선수와 다른 몇 명의 농인 선수들을 위해서 스트라이크일 때 손을 번쩍 드는 식으로 표시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야구 심판의 손동작은 농인 선수들의 편의를 고려해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야구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경기에 자그마한 재미와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심판의 손동작으로 말미암아 야구를 재미있게 관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농인들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다. 내가 알기로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열렬한 야구팬이라 하는데 만일 심판의 손동작이 없다면 과연 야구를 즐겨보는 팬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


알고 계셨나요?

오늘날 스포츠계에서 프로팀이 많이 창설되어 많은 스포츠 팬들에게 훌륭한 여가 선용과 스트레스 해소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프로 야구, 프로 축구, 프로 배구, 프로 농구, 등등. 스포츠의 강국인 미국에 비하면 종목이 적지만 그래도 프로 스포츠 팀을 가진 국가라는 체면은 섰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에는 프로라는 이름을 붙인 스포츠 종목은 단 두 개 뿐인데 바로 프로 권투와 프로 레스링이었다. 그 당시 나는 어렸기 때문에 주먹만 써서 상대방을 가격해야 하는 프로 권투 시합이 도통 재미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박진감 넘치는 다양한 기술로 상대 선수를 치고 조르고 박치기하고 날렵한 모습으로 공중으로 붕 떠서 발차기 하는 등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프로 레슬링 팬이 되었다.


중학생 때 어렵게 장만한 텔레비에 프로 레슬링 시합이 나오면 당연히 장남인 내가 채널 독점권을 행사해서 동생들이 좋아하든 말든 아랑곳 않고 프로 레슬링 시합을 신나게 관람하곤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양복 일에서 쉬시는 날이면 (내 기억으로는 격주 일요일에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때 쉬셨다) 어쩔 수 없이 채널권을 아버지께 넘겨주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도 남성이신지라 스포츠를 좋아하시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내게 그토록 박진감 넘치고 어린 피를 들끓게 만드는 프로 레슬링 경기보다는 프로 권투 경기를 즐겨 시청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권투시합 말고 레슬링 시합을 보자고 조르면 아버지는 프로 레슬링은 쇼라면서 끝내 시청을 거부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프로 권투 시합을 보아야 하는 내 마음은 눈물이 날 정도로 쓰라렸다.


하지만 다행히 김삼열, 오철수 같은 선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들과 함께 직접 장충 체육관에 가서 프로 레슬링 경기를 관람할 때가 가끔 있었는데 경기가 끝난 후에 집에 돌아갈 때면 참으로 신기하게 모든 스트레스가 증발된 것처럼 시원하기만 했던 느낌이 남았다.


어쨌든 그 덕분에 유명한 레슬러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데 장영철 선수, 천규덕 선수(그의 아들이 지금 중견 탈렌트로 공중파 방송가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박치기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 일선수 등이다.


내가 비록 어리숙하지만 어린 눈으로 볼 때 김 일 선수는 당연히 일류이고 그 다음이 장영철 선수 그리고 천규덕 선수라고 등급을 매겨 줄 수 있었는데 관중들을 심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2류나 3류 정도의 레슬러들이 메인 게임 전에 나오는 오픈이나 중간 게임에 나와서 시합하는 순서를 포함시켰는데 놀랍게도 그들 중에 농인이 있다는 것이다.


선배들의 설명에 의하면 두 사람의 농인 레슬러가 있다는데 그 중 한 사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왜 그가 기억에 남는가 하면 그의 독특한 헤어스타일 덕분이었다. 이마에서 뒷통수까지 가운데만 남기고 온통 빡빡 깎았기 때문에 마치 로마제국 시절의 막강한 로마병사들이 착용하는 빨간 색의 닭의 볏처럼 생긴 투구를 연상케 하는 그런 헤어스타일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그저 이류나 삼류 레슬러 정도로만 여기고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들으니 그가 농인이라고 해서 그 다음부터는 그가 나오는 경기에는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1류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많은 성싶어 아쉬움을 주지만 그래도 그가 농인의 몸으로 사각의 정글이라는 프로레슬링 링에 들어가 선전하는 모습을 보면 농인에 대한 일반 사회의 냉대와 천시로 인해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어린 나의 가슴에 한가닥 후련함을 주었을 뿐 아니라 힘과 격려가 되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불행히 나는 그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소문에 의하면 그 당시 활약했던 농인 레슬러 두 사람이 각각 부산과 부천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한번 시간이 허락하면 직접 만나보고 젊은 시절 선수로 찍은 그들의 사진을 보면서 지긋이 눈을 감고 그 당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흥분, 탄식, 환호, 경악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을 동원해서 레슬링 시합에 몰입했던 그 시절의 생생한 느낌을 다시 음미해보고 싶다.


김일 선수 같은 일류가 아니라서 어린 나에게 우상과 같은 스타가 되기에 함량이 미달한 그런 선수였지만 그래도 같은 농인이라는 동질감이 작용해서 은연중에 그를 응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역시 사람은 팔이 안으로 굽히지 밖으로 굽히지 못하는가보다.

어쨌든 그 당시 프로레슬링 계에서 농인 두 사람이 비록 인상적인 기량을 펼쳐 보이지 못했어도 당당히 레슬러로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신기했다. 오늘 프로 스포츠계에서 활약하는 농인 선수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씨름 선수 중에 백두급에서 활약하는 농인이 한 사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은퇴했는지 아니면 현역으로 계속 활동 중인지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프로레슬링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시절 무척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프로 권투에 점차 흥미를 느껴 열렬한 팬이 되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프로 레슬링은 쇼라고. 어린 시절 판단력이 미숙했던 내가 프로레슬링 시합이 쇼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예리한 분석 능력이 없어서 아버지가 왜 프로 레슬링이 쇼라고 하셨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검은 구레나룻 수염을 한 장영철 선수가 시합 도중 갑자기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폭탄 선언하는 바람에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점차 시들어갔으며 끝내 재기불능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다’ 수화의 비극성

문법에는 여러 요소가 있는데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등등이 언어 문장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동사가 그의 삶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식물인간이 아닌 이상 그리고 목숨이 아직 붙어있는 한 매일 매일 무엇을 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운명이다.


그러면 동사에 속한 수많은 단어들 중에 대표적인 동사를 들라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하다’를 능가할 단어는 없을 것이다. 수어에도 ‘하다’ 수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한국수화 ‘하다’를 살펴보면 비극이 서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나의 논거를 입증하기 위해서 우선 다른 나라 수화들과 비교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의 수화 ‘하다’에 해당하는 ‘do'는 양손을 컵을 쥔 듯한 'C' 지문자 형태로 해서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해서 앞으로 나란히 세운 후 양손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마치 양 손이 움직임으로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그런 표현이다. 그리고 일본 수화로는 ’주먹 쥔 양손을 앞으로 나란히 세운 후 동시에 앞으로 내미는 것으로 표현된다. 미국 수화와는 움직이는 방향이 다를 뿐이지 거의 비슷한 콘셉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수화 ‘하다’는 오른손 주먹의 손날부분을 왼 손목에 두 번 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한 손을 움직이는 것으로 인해 ‘하다’의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데 아마 부족함이 없겠지만 문제는 그런 수화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수화는 ‘수고’라는 의미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고’라는 수화가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은 장시간의 노동으로 인해 쑤시는 듯한 아픔을 달래기 위해 안마를 하는 형상이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하고도 흥미로운 의미 전달이 성립되는 그런 표현으로 평가된다.


미국과 일본의 수화에는 양손의 동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있지만 한국수화는 수고롭다거나 힘들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듯하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의 경우 ‘하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체험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수화 ‘하다’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 한 평생 전신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특히 생계를 위해서는 필연 일을 해야 한다. 단순 노무직이라면 양손의 움직임은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양손을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어떻게 제품을 만들거나 정리하거나 운반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


한국수화로 ‘하다’를 이렇게 표현한데서 오는 두 가지 인상이 아마 가능할지 모른다.


하나는 한국 농인들에게는 ‘하다’가 귀찮고 성가시고 힘든 것으로 여겨지고 그냥 누워 잠만 자고 노는 것을 상팔자로 인식되는 그런 게으른 성품이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한국농인들에게는 좁은 한국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행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그도 그럴 r것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농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척 고단하고 힘들고 고생스럽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고 말못하는 장애인으로 지내면서 청인들로부터 곱지 않는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고 심하면 어처구니 없는 편견의 희생양이 되어 유형무형의 불이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농인들의 서글픈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다보니 무엇을 한다는 것도 덩달아 수고스럽고 고단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다행히 근래에 정부에서 장애인 복지 혜택에 관심을 갖고 아직 미흡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여러 가지 복지 시책을 실시함으로 많은 농인들이 전보다는 확실히 나은 것 같다고 반색하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취업에 있어서 차별은 여전하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승진이 안되고 임금도 적게 받아야 하는 불리한 대우가 21세기에 접어든 현재도 근절이 안되고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만일 이런 억울한 불공평한 상황이 계속 된다면 농인들에게는 무엇을 한다 해도 이것이 형극이요 천신만고에 불과하다고 불평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는 정당한 하소연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한국 농인들이 ‘하다’ 수화를 ‘수고’와 동일하게 표현한 것은 청인들의 차별과 편견 그리고 폭거에 대한 의미 있는 항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차라리 정당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장애인들을 차별하고 편견을 품고 있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다. “당신들, ‘수고’의 의미도 통하는 ‘하다’ 수화를 보면서 과연 양심에 찔리는 것이 없습니까?”라고.


‘에바다’에 담긴 예수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

갈로뎃 대학의 심볼 마크를 보면 외곽을 원형으로 해서 빙둘러서 지문자가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E.P.H.P.H.A.T.H.A.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에바다'라는 단어를 지문자로 표시한 것인데 이 ’에바다‘라는 단어보다 농인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어는 예수께서 한 귀가 먹고 어눌한 농아인을 고치실 때 사용된 것으로 그 의미는 ’열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상당수 갈로뎃 대학생들은 이 ‘에바다’라는 단어에 반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심지어 대학의 심볼 마크에서 이 단어를 퇴출해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째서 그런가? 간단하다. 예수께서 ‘에바다’ 하심으로 듣지 못하고 어눌한 한 농아인이 청력을 회복하고 분명하게 발음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에바다’는 결국 농인보다는 청인이 더 낫다는 인상을 줄 수 있고 구화주의가 수화주의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농인들 뿐 아니라 청인들에게도 호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단 그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지만 나는 이 ‘에바다’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 농인들이 존재하고 있는 한 영구히 존속되기를 원한다. 그렇다고 내가 마치 모든 농인들이 청력을 회복하고 또렷하게 발음함으로 청인처럼 기능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고 성급히 속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물론 ‘에바다’는 ‘열리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한 귀먹고 어눌한 농아인을 고쳐주실 때 막힌 귀가 열리고 뻣뻣한 입이 열려서 청각 언어 장애에서 자유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은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농이나 농문화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이 대단한 갈로뎃 대학생들 입장에서 이 단어에 대해서 분개를 참지 못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단어에 주어가 생략되어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에바다’라는 단어 안에 주어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열리라’는 뜻이지 무엇이 열리라는 것인지 그 주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있다. 물론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단어가 출처되어 있는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에바다’가 다름이 아닌 귀와 입이 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문맥을 살펴보면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그래도 나는 집요하게 예수께서 ‘에바다’ 하실 때 주어를 명시하지 않고 그냥 ‘열리라’고 하신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께서 농아인을 위해 ‘에바다’ 하실 때 귀와 입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들이 열리라는 의미로 사용하셨다고 믿고 싶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께서 농아인에게 막힌 장벽이 무엇이든 다 허물어뜨리시고 그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시기 위해 ‘에바다’ 하셨다고 긍정적으로 진취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이 ‘에바다’가 농아인에게 엄청나게 기쁜 소식과 방불한 ‘복음’이요 저주의 어두운 그림자를 시원하게 몰아내
는 ‘축복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에바다’가 실은 농인들을 무능, 무지, 무력에서 구원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억눌리던 모든 편견이나 차별적 요소들을 통쾌하게 괴멸시킨 위대한 선언에 다름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면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자신의 듣지 못함을 즐거워할 줄 아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과연 예수께서 ‘에바다’ 하심으로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 농인들에게도 문호가 열려서 교육의 기회가 열리고,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려 ‘이등 시민’이라는 경멸과 천시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하도록 많은 농인들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과 호의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살기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제 농인들이 최초의 갈로뎃 대학 농인 총장을 지냈던 킹 죠던 박사의 말대로 “듣는 것 외에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외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의 ‘에바다’라는 선언 덕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에바다 덕분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농인들의 교육과 복지 그리고 취업은 물론 활발한 사회참여에 있어서 발군의 업적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우연의 소치가 아닌 것이다.


“열리다”라는 단어는 확실히 좋은 뜻이 다분히 실려 있는 어휘다. 오죽하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열린’이라는 수식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열린 음악회’, ‘열린 마음’, ‘열린 생각’, ..... 등등. 이 좋은 의미를 지닌 ‘열리라’는 뜻의 ‘에바다’를 우리 같은 농인들을 위해 주신 예수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제 “농아인은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니 청인들보다 열등한 결함있는 부류에 속한다”는 마귀가 쳐놓은 저주스러운 주술에서 확 벗어나게 해 주신 ‘에바다'라는 말의 위대한 힘을 믿고 ’할 수 있다, 해보자‘ 하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온갖 장애물을 뛰어넘는 역량을 만천하에 과시해보일 차례가 도래했다고 나는 자신있게 장담하고 싶다.


사랑하는 농인 형제 자매들이여! 화이팅!


예수는 과연 국수주의자인가?

경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이 부족한 저의 블로그를 애독하시는 독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박창후 형제님의 댓글을 보니 해명할 필요성을 느껴 다시 글을 올립니다.


문제가 되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는 너무하실 정도로 쌀쌀맞게 대하시고 심지어 그 녀를 ‘개’와 동일시하는 듯한 모욕을 불사하셨지만 농아인에 대해서는 그가 이방인일 개연성이 높음에 도 불구하고..." 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혐오하시고, 유대인만 각별히 아끼시는 그런 인물로 그려졌다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사실은 제가 예수님이 이방인을 혐오 배척하시는 국수주의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사랑하시는 만큼 이방인들에게도 애정을 보이시는 분이시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서 쌀쌀한 태도를 보이셨을까요?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예수께서 그 이방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 이방 여인은 예수께서 주신 시험에 통쾌하게 통과함으로 예수님의 분에 넘치는 칭찬과 기쁨을 사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겸손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본문을 놓고 본다면 수로보니게 여인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쌀쌀맞은 것처럼 보인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이방인을 혐오하시는 분이라고 섣불리 속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저의 자명한 판단입니다. 저는 저의 글 어디에서도 예수께서 이방인을 혐오하시는 분이시라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저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한국인이니 유대인 입장에서 이방인에 속한 사람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반 이방인 정서를 고수하시는 분이시라면 제가 그런 분을 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고 섬겨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시지만 처음에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서 쌀쌀맞게 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수의 성서학자들이 이방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농아인에 대해서 보이신 예수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따스했기 때문에 일부 성서학자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평하였던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저는 결코 예수께서 반 이방인 정서를 가지신 매우 편협 옹졸한, 국수주의적인 분이라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한가지 제가 좋게 평가하는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이방인 여자, 아이들의 편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에 흔쾌히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다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 특히 여자, 아이,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 그리고 장애인 같은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지극한 바가 있다고 하면 아주 정확하고 훌륭한 진술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득권자나 힘 있는 자나 가진 자를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이들을 이유없이 증오하고 배척하지는 않지만 세상이 외면하고 무시하는 약자들에 대해서 놀라울 만큼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에게 위로와 가능성과 힘과 희망을 제시해주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가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저는 예수께서 농아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바가 있다고 굳게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제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저를 변화시켰으며 제가 농인임에도 불구하고 열등의식을 버리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낙천적으로 살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과연 이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얼마나 상당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것이 교회가 자성하고 고민해야 할 명제입니다.

 

 

 


예수의 농인에 대한 사랑은 과연 각별한 바 있는가?

전번에 올린 “장애인에 대한 성서적 관점”이라는 글에 대한 박창후의 댓글을 보면 마가복음 7장 31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예수의 농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행동에 대해서 그는 당시 사회의 농인에 대한 무관심과 농인이 처한 불우한 환경에 대한 분노의 표시라고 해석하였는데 제법 그럴 듯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갈로뎃 대학 역사학 교수인 죤 비크리 반 클리브와 배리 A 크라우치가 쓴 “A Place of Their Own"이라는 책(장진석 교수가 ‘미국농사회의 변천사’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발간하였으니 일독을 권한다)을 보면 예수가 농아인을 고치신 기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어조로 평가하고 있는데 아마 예수가 농인을 청인으로 고치신 결과 청각장애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반드시 치유되어야 하는 질병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 여파로 갈로뎃 대학생들 중에 반 예수 정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과연 이 두 교수의 논조는 타당한 것인가? 과연 예수는 청각 언어 장애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계시는가?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학교에서 성서 해석을 공부했다. 성서 해석학을 공부하지 못하면 성서를 제대로 읽고 바르게 해석할 수 없을 터이니 성경을 읽고 설교해야 하는 목사 입장에서 성서해석학의 비중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갈로뎃 대학 역사학과 교수들이 예수는 농친화적(聾親和的)인 인물이라기보다 반농적(反聾的)인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은 순전히 예수가 농아인을 청인으로 고쳐주신 행동에서 그 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그 두 교수는 신학 훈련을 받은 분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깊이 있게 읽을 줄 모르는 그야말로 평신도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폭로할 뿐이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성경 중에서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문학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때로는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성경인 것이다. 때문에 글을 좀 안다고 해서 성경을 문제없이 읽고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당돌한 도전에 다름이 아니다. 몇 년전 기독교를 받아들인 석학 이어녕 교수는 지상의 언어와 지성의 언어를 사용하여 교수로, 작가로 살아온 만큼 성경을 무난하게 읽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있었지만 막상 성경을 읽어보니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서 성경은 지성의 언어로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영성과 믿음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로고스 언어로 읽혀져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고백하는 글을 남겼다. 그만큼 성경 해석은 영적 차원을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나는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서 어떤 부분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가장 깊은 성경의 비밀은 로고스의 언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제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석의학 지식을 원용해서 왜 예수의 농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바가 있는지 증명해보이려고 한다.


마가복음 7장 31절에서 37절까지의 내용은 박창후씨가 밝힌 대로 예수께서 농아인을 고쳐주신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보면 사람들이 한 귀먹고 어눌한 농아인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기를 간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안수해달라는 것은 그 농아인을 청인으로 기적적으로 고쳐달라는 의미라는 것은 과거에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안수라는 방식으로 고쳐주신 사례가 있음을 미루어 쉽사리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들의 요청대로 ‘안수’를 통해 그 농아인의 청각과 언어 장애를 고쳐주기를 거절하시고 오히려 번거롭기 조차한 과정과 방법으로 고쳐주셨다.


그 첫째 조치는 그를 무리에서 벗어나 따로 한적한 곳에 데리고 가신 것이다.

그냥 무리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 농아인을 안수하기만 하셔도 쉽게 고쳐주실 수 있는데 왜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났을까? 불행히 본문은 이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아 우리의 알량한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단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실 때 그 농아인은 예수와 독대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렸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 예수와 독대를 체험한 경우가 없다. 적어도 복음서를 살펴보면 말이다. 이를 두고 엘돈 트루블럿이라는 성서학자는 예수께서 그 농아인에 대해 courtesy를 보이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courtesy는 정중함, 공손, 예의바름, 호의, 우대, 특별취급 등의 의미를 가지는 영어 단어인데 그 어원은 court 즉 ‘궁전’, ‘왕실’에서 나온 것이다. ‘어전 회의’라는 의미도 결국 왕이 주재하는 자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왕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 농아인을 따로 데리고 무리에서 떠나신 것은 그 농아인을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 즉 VIP(귀빈) 쯤으로 취급하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대목에서 예수의 각별하신 사랑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 감격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는 손가락으로 귀를 찌르시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왜 예수는 그런 행동을 하셨는가? 간단하다. 그 농아인에게 귀와 혀를 고쳐주겠다는 의미를 제스츄어로 혹은 수화로 전달하시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수화라기보다는 제스츄어에 가깝지만 수화든 제스츄어든 이렇게라도 농아인에게 의사소통을 시도하시려는 예수의 노력이 참으로 감동적으로 내 가슴에 와닿았다. 내가 5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듣지 못하는 나에게 제스츄어로라도 의사소통을 해보려고 시도한 청인을 만나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농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들은 나에 대해서 부담스러운지 마치 모래 씹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거나 피하기에 급급했다는 씁쓸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듣지 못하는 농아인에게 네 귀를 열어주고 네 맺힌 혀가 풀려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하는 뜻을 제스츄어로 전달하시는 모습에서 예수의 따뜻한 사랑을 나는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이 부분에 있어서 거북스러운 점은 예수께서 침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이다. 왜 침을 뱉으셨을까. 어떤 성서학자는 예수 당시 사람들이 침을 하나의 약으로 인식하고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했음을 밝혔는데 나는 예수께서 그 농아인의 앞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는 시늉을 통해 그 농아인에게 혀를 고쳐주겠다는 뜻을 전달하신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예수께서 자신의 손에 침을 뱉으시고 그 농아인의 혀에 침 묻힌 손으로 대셨는지 아니면 그냥 땅에다 침을 뱉으시고 침 묻히지 않는 손으로 혀에 대셨는지 본문 말씀을 깊이 고찰해도 분명하게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 밝히고 싶다. 같은 값이면 후자를 택하고 싶다.)


그 다음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

왜 그런 행동을 취하셨을까? 탄식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해석해야 된다는 박창후의 주장은 일견 옳은 것 같지만 하늘을 우러른 행동에서 분노를 연결 짓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신약에서 하늘을 우러른다는 표현이 마가복음 6장 41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감사의 뜻으로 취하신 행동이었다. ‘탄식’이라는 행동은 분노나 절망이나 슬픔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뿐 아니라 안타까움, 절실함, 긴장감, 전력투구, 심지어는 행복이나 안도의 의미도 가능한 실로 복잡다단한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이다.


하늘을 우러른 상태에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탄식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하늘을 우러러 보는 행동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상징적 제스츄어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분노의 의미를 담은 탄식을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나 적개심 표시로 오인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라기보다는 안타까움이나 아픔으로 해석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농아인의 불우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어 깊은 연민의 정으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여기서 예수의 농아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내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많은 성서학자들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행동을 ‘기도’의 형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탄식하다’라는 헬라어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로마서 8장 26절이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탄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헬라어로 ‘탄식하다’와 같은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것은 기도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성서학자들의 주장은 충분히 타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것은 그 농아인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그 농아인을 위한 간절한 기도의 행위라고 봐야 하는지 내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이렇게 해석하든 저렇게 해석하든 예수의 농아인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동이 없다. 농아인을 위해 탄식하실 만큼 간절하게 기도하실 정도라면 이는 분명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청력을 잃은 나 때문에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주신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랑’이라는 어휘를 아직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였지만 이러한 어머니의 기도의 모습에서 나는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 해석할 줄 알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바다’하고 소리치심으로 마침내 그 농아인의 입과 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이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성자 예수께서 이번에 ‘에바다’ 하심으로 오랫동안 침묵의 세계에 갇힌 농아인을 자유롭게 하신 것이다.


이미 위에서 갈로뎃 대학생들 중에 예수께서 에바다 하심으로 농아인의 귀를 열리신 사실에서 반감을 품고 예수를 반농적(反聾的)인 인물로 배척하는 운동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 농인들과 1세기의 농인들의 상황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농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역사를 보면 옛날에는 이들의 상황은 참으로 열악하고 참담했다고 한다. 농인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주기는커녕 짐승 취급했으며 심지어는 귀신이 들린 자로 인식하고 학대하였다는 사실을 멀리 1세기까지 거슬려 올라가지 않더라도 19세기에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농인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익히 아시는 예수께서 농인의 고통과 애환을 가슴 속 깊이 아파하시기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을지 모른다. 그래서 흔쾌히 그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가 풀려 말을 분명히 할 수 있도록 고쳐주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에바다’에 대해서 나는 다음에 길게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이쯤 하기로 하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 만나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고침 받은 그 농아인의 국적과 관련된 문제이다. 본문은 그 농아인이 고침을 받은 장소를 데가볼리라고 밝히고 있다. 마가복음 7장 31을 보면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라고 되어 있어 기적이 발생한 장소가 갈릴리 호수라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 헬라어를 보면 기적을 행한 곳이 데가볼리라고 되어 있다. 적어도 성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기적이 일어난 장소를 데가볼리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참고로 신약성경은 원래 헬라어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알아두자.)


예수 당시 데가볼리는 어떤 곳인가?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살던 이방 지역이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이 있었는데 그 거라사 지방은 데가볼리의 일부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무서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막힘 없이 고치신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데가볼리 지방 사람들이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인을 데리고 찾아가 고쳐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따라서 고침을 받은 농아인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일 개연성이 높다.


예수께서 그 농아인이 이방인임에도 청각장애를 고쳐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흔쾌히 고쳐주셨다는 사실에서 마가복음 7장 24절에서 30절까지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이야기와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는 너무하실 정도로 쌀쌀맞게 대하시고 심지어 그녀를 ‘개’와 동일시하는 듯한 모욕을 불사하셨지만 농아인에 대해서는 그가 이방인일 개연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과 전혀 딴판으로 대하셨다는 사실에서 예수의 농아인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게 나는 예수의 농아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바가 있음을 마가복음 7장에서 수월하게 찾아낼 수 있다.


장애인 복지나 장애인 교육에 관한 한 기독교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구원 사역을 중심으로 시작한 종교로서 카톨릭과 동방 정교와 개신교를 아우를 경우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가 기독교이다. 물론 일부 기독교 신자들의 신실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환멸과 실망의 사유가 될 수 있지만 성경 말씀을 깊이 읽어보면 얼마나 놀라운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지 모른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분명 위대한 종교이다. 다만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엉터리 신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는 훌륭한 크리스쳔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주위에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특별한 지위로 인해 어느 다른 책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자랑한다. 도대체 성경의 어느 부분이 문제인가? 성경 말씀 중에 분서갱유할 만큼 인류에 해악을 준다고 판단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라도 하는지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성경은 나에겐 최고의 영혼의 양식이다. 성경이 부족한 나를 변화시켰고 그것이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이 된다. 나는 장담하건대 성경이라는 위대한 책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의 상황이 훨씬 퇴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확실히 세상에 아름답고 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성경을 깊이 공부하지 못한 사람 특히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은 말씀의 기막힌 꿀맛을 체험할 수 없다.


한국 농아교회 목사 중에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심오한 말씀의 비밀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영적 해석의 능력을 가진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고 싶다.


12월16일 서울농학교 교원 연수 장면.


장애인에 대한 성서적 관점

장애인이란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데 현재는 다소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일반 사회의 인식은 극히 편견으로 가득하고 부정적이었다. 장애인을 만나면 재수 없다느니 전생에 죄가 많아서 장애인이 되었다느니 하며 멸시하고 천대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성경에서는 장애인에 대해서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가 다수 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릇되고 부정적인 장애관이다. 성경은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살펴보면서 명랑하고 행복한 삶을 노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첫째, 장애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장애인 속에도 발견되기 때문에 장애인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은 곧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가 되는 것이다. 조폐공사에서 인쇄되어 새로 발권된 일만원 짜리 지폐가 여러 사람들의 손에 전전하는 동안 구겨지고 더러워졌다고 해서 그 가치가 8천원 혹은 5천원으로 내려앉는 법이 없이 여전히 새로 나올 때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절대 불변의 가치가 장애로 인해 훼손되고 삭감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장애인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께서 수많은 장애인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이들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복음서에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각별하신 장애인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에 신체 건강한 비장애인들만 아니라 장애인들을 위해서도 대속제물로 희생하셨다는 것인데 그 사실을 고려한다면 장애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각별하신 바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우리 장애인들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 받게 되니 이는 얼마나 놀라운 신분 상승인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제는 왕자 공주 부럽지 않는 고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얼마든지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면 장애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할 수 없게 좌절시키는 걸림돌이나 장벽으로 작용하게 하지 못한다. 헬렌 켈러를 보라. 삼중고를 극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성공적인 장애인의 표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20세기의 기적이라는 찬사와 존경을 들은 위인이다. 강영우 박사를 보라.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역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미국 명문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을 뿐 아니라 부시 행정부에서 장애특위 위원장이라는 고위직을 지낸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었다. 송명희 자매를 기억하는가?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입고 있음에도 밝고 아름다운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감동적인 시를 다수 뽑아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었다. 필자는 과거에 영락농아인교회 담임으로 지내면서 세계최대의 농아교회로 부흥 성장시켰으며 미국에 건너가서 미국농아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는 동시에 세계에서 유일한 농아 대학이자 세계농아계의 메카라는 갈로뎃 대학 교목이 되는 특권을 누려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장애인이라도 얼마든지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들인 것이다.


장애인들이여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 이를 즐기고 만끽하는 가운데 기를 펴고 행복한 삶을 마음속에 그려보면서 주를 찬양하는 가운데 밝고 명랑한 삶을 건설해 보지 않겠는가.


어느 수어통역사의 이야기

요즘 수어통역센터가 전국에 걸쳐 많이 설립되어 의사소통에 곤란을 느끼는 농인들의 입과 귀 역할을 해주는 수어통역사들이 활약할 수 있는 여건을 한층 강화하고 있어 감사한 마음 금할 수 없다. 현재 수어통역자격고시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획득한 수어통역사가 정확히 몇사람인지 통계를 보지 않아 모르지만 수어통역자격고시가 처음 실시한 것이 1997년이니까 이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은 현재 이미 1000명선을 돌파했으리라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앞으로 수어통역사들이 계속 배출되어 사회 각지에 배치되어 농인들의 편의를 도모하게 되면 그야말로 농인들에게 ‘살기 좋은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믿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내가 아는 후배한테 수어통역사에 대한 불평을 들었다. (수어통역을 의뢰한 후배를 여기서 편의상 A라고 하고 수어통역사를 B라고 하자.) A는 몇 년 전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그 후 형제자매를 상대로 유산 문제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형제자매가 A씨 모르게 부모가 남긴 유산을 가로채 자기들끼리 나눠 가져간 것 같다는 의구심이 생겨서 이들 상대로 외로이 법정 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전에 A씨는 형과 누나와 만나 유언장 문제로 논의를 하려고 수어통역사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B씨가 그 날 수어통역사로 오게 되었다. 약속 시간과 장소에 가보니 B씨는 일찍 도착했는지 누나와 대화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지나쳤는데 문제는 통역 업무를 마친 후에 발생했다. 형과 누나와의 대화가 오고 간 후에 헤어지려는데 누나가 B씨를 불러서 돌 던질 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A에게 등을 보이면서 잠시 둘이 함께 한 것이다. A씨는 누나와 B씨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아보려고 가까이 접근하려다 형의 제지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오히려 의혹을 더 키운 꼴이 되었다. 문제는 B씨가 누나와 함께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왜 누나가 B씨를 불렀으며 A씨가 보지 못하게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을 던질 만큼의 거리에 가서 무엇을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대화만 하려고 그랬을까? A씨는 그때 B씨가 누나한테 봉투를 받은 것 아닌가 의혹을 품기 사작했다. 이러한 의혹은 나라도 품음직하다. 아마 B씨는 봉투를 받은 적 없다고 하면서 억울하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50보 양보해서 그녀를 믿어준다고 해도 그녀가 의혹을 살만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도저히 직업수어통역사다운 사려분별이 있는 행동이 아닌 것이다. 직업 수어통역사라면 수어통역을 의뢰한 농인 고객에게 의혹을 살 만한 어떠한 행동을 저질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수어통역사라면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도 농인 고객의 허락이 없는 상황에서 고객의 누나와 형과 개인적인 대화를 피했을 것이다. 아직 고객이 도착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고객이 상대할 사람과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수어를 사용하면 몰라도 농인 고객이 알아들을 수 없게 음성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농인의 알 권리를 유린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수어통역사는 의뢰한 농인의 부름을 받아 현장에 달려온 사람이다. 농인의 허락 없이, 양해 없이 고객이 상대할 사람과 수어 없이 음성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그 수어통역사의 직업성이나 전문성을 의심할 만한 사려깊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행동인 것이다.


그리고 누나와 형과의 논의를 마친 후 헤어지려는데 누나의 부름에 냉정히 거절하지 않고 응함으로 고객에게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보인 것은 그 통역사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의 성격에 무지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직업 수어통역사라면 누나가 잠깐 보자 해도 직업 윤리상 그럴 수 없다고 냉정히 거절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게 전문 직업인다운 행동이다. 나는 B씨의 수어통역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바 없다. 아무리 수어통역에 능하다 해도 잠시 고객의 곁을 떠난 경거망동은 그녀를 우수한 통역사로 평가하여 주고 싶은 마음을 잃게 한다.


한국에 수어통역사가 1000명을 돌파했지만 직업윤리 강령에 대해서 아직 허점과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우려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수어통역사들 모두 농인들을 위해 일하는 고마운 존재라는 인식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지만 B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망을 느꼈다. 나는 B씨가 누나한테 봉투를 받았다고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애써 B씨의 결백을 믿어주고 싶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녀가 누나의 부름에 응하여 고객 곁을 잠시 떠난 것은 직업윤리 강령에 벗어나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만큼은 부인할 길 없다. 아마 그 때에 A씨는 B씨한테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B씨가 어떻게 A씨의 허락 없이 누나한테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 행동은 잠시 A곁을 떠나 누나한테 간 B씨가 그 때만큼은 수어통역을 의뢰한 농인 A씨의 편이 아니라 누나 편에 서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만하다.


당연히 농인들의 원군이요 벗이어야 할 수어통역사가 농인 고객들의 불신의 대상이 된다면 과연 이 한국 땅에 농인들의 인권이 완전히 보호받고 있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미치니 나의 마음은 어둡고 우울해진다.


‘다행’ 수화에 깃들어 있는 페이소스(pathos)

‘다행’(多幸)은 한문에서 보듯 좋은 운수가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좋은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결코 나쁜 뜻으로 쓰여지지 않는 길(吉)한 어휘이다.


그러면 수화로 어떻게 표현되어지는가? 한국수화 표현으로는 오른손가락 바닥으로 이마를 훔치듯 하고 그 손을 떨치면 된다. 이런 표현은 마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을 닦은 후 뿌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일본수화는 어떤가? 일본수화로 ‘다행’은 ‘복(福)’ 수화로 표현된다. ‘행운’도 마찬가지다. ‘복’ 수화로 표현된다. 그리고 미국수화로는 펴 있는 손가락 중 중지 끝을 턱 가운데에 댔다가 손을 비틀어 밖으로 돌리면 된다. 행운을 의미하는 어휘를 수화로 표현하는데 왜 중지를 턱에 대어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참고로 미국 수화로 ‘favor'를 중지 끝을 턱 가운데에 두 번 붙이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luck'이나 ‘fortunate'을 표현할 때 ’favor'를 어원으로 해서 중지를 턱에 붙였다가 손을 바깥으로 비틀어 돌리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다행’이라는 미국수화는 ‘행운’이나 ‘총애’, ‘호의’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두자.


그런데 한국수화 ‘다행’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다가 뿌리는 시늉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수화에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잠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길 없다. ‘다행’은 이미 언급했듯 좋은 의미가 있는 어휘이다. 그렇기에 일본 농인들은 ‘복’과 동일한 수화로, 그리고 미국 농인들은 ‘호의’, ‘총애’ 등의 의미를 지닌 favor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 수화로 ‘다행’을 표현하고 있다고 위에서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행’이라는 무척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수화로 표현할 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뿌리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가? 체내에 생성된 열기를 바깥으로 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땀을 몸밖에 내보내는데 이 땀은 더위 혹은 운동이나 체내 에너지 소모가 심한 노동 때문에 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체내에 생성된 열기를 식히기 위한 수단으로 분비된 액체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것을 훔치지 않고 방치하면 땀이 눈에 들어가 불편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으로 땀을 닦아내는 것이다.


보통 더위나 운동이나 노동 때문에 땀이 나오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때로는 긴장 탓에 땀이 분비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았다 뿌리면 그 긴장이 풀려서 안도한다는 의미의 제스츄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다행’이라는 수화를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가 뿌리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상쩍은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행’ 수화는 더위나 운동이나 노동과 아무 관련이 없고 오히려 ‘안도’와 연관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수화 ‘다행’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런 추론을 얻을 수 있다. 즉 농인에게는 세상을 사는 것이 살얼음을 밟는 듯한 위기감의 연속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쉽지 않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사는 것이 험난하고 까다로워서 오늘 하루라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다면 이것이 안도를 수반하는 ‘다행’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농인들의 페이소스가 있다. 일본 같으면, 미국 같으면 당연히 행복이나 복으로 간주되어야 할 ‘다행’이 한국 농인들에게는 안도의 한숨이 섞인 이마에 맺힌 땀 훔치기가 되니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수화 표현이 가능한 배경에는 농인들의 고달프고 험난한 삶의 질고가 짙게 서려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웅변하여 준다.


예전에 학창시절 등교나 하교 시 시내버스를 탈 때 운전석 앞 유리 위에 두손을 모아 기도하는 소년의 그림 밑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자가 찍혀있는 작은 종이가 붙어 있는데 운전사가 하루 동안 수많은 승객들을 태우고 노선을 운행하는 동안 사고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을 이 종이가 대신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농인들이 고달픈 인생을 사는 동안 하루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안도의 의미로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훔쳐서 뿌리는 표현이 더욱 어울리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행’ 수화를 보노라면 눈물이 난다. ‘다행’ 수화는 농인들의 눈물겨운 적자생존의 증언이요 흔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청각장애교육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참관기

11월 3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한국 농교육 100주년을 기념해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문자 그대로 미국, 일본, 중국, 카나다,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 등 여러나라의 청각장애교육학 학자들이 농교육 관련 주제를 갖고 발표하는 자리였는데 내가 유일한 농인 발표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모두 13명의 학자들이 각각 20분씩 (더러는 시간을 초과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발표하는 학술대회라서 그런지 강당은 족히 500명이 넘을 정도로 만원을 이루었다. 하지만 참석자들 중에 농인은 열 명을 넘지 못한 것 같아 주최측에서 농관련 단체에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농인들이 초청을 받고서도 관심이 없어 불참을 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농인 참석자가 소수라서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지금부터 100년전 미국의 감리교 여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가 평양에서 한국 최초의 농교육을 시작한 것을 기념해서 열리는 행사이기 때문에 좀 더 많은 농인들이 참석해주었어야 옳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수화주의에 대해서 거론한 학자는 대구대학교의 김병하 교수, 미국 북플로리다 대학의 도날드 무어즈 교수 그리고 한국재활복지대학의 원성옥 교수를 꼽을 정도이고 나머지는 청능주의, 인공와우수술 등 구화주의와 관련이 있는 주제를 집중 거론하였기 때문에 학술대회는 구화주의에 경도된 듯한 느낌을 주기에 족했다. 이 행사를 주최한 단체는 한국청각장애교육 100주년 기념사업회인데 상임 대표로 최참도 한국구화학교 교장이 맡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특히 연세대학교의 김희남 박사와 일본 동경대학교의 카가 키미타카 교수가 인공와우 이식에 대해서 발표하였는데 농인 참석자들 중에 일부는 청각장애교육에 관한 학술대회인지 아니면 이비인후과 의학 학술대회인지 헷갈린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이번 청각장애교육 학술대회는 농인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의 향상이나 개선보다는 농인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청인 사회에서 청인처럼 기능할 수 있느냐 하는 청능적인 효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학술대회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것이 나를 비롯하여 대회에 참석한 농인들의 공통된 소감이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는데 순서를 맨 나중에 배치한 관계로 내 차례가 될 지음에 (오후 4시 30분 쯤) 이미 강당에서는 많은 참석자들이 빠져 나가 분위기가 다소 썰렁했다. 500명 넘는 참석자들 거의 전부가 청인이고 아마 이비인후과 의사, 언어 발음 교정가, 청능전문가, 구화주의를 지지하는 학부모들이 대거 참석했을 성 싶은 대회라서 수어를 구사하는 농인의 주제 발표를 들으려고 끝까지 자리를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크게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하고 한국어를 제2언어로 해서 가르치는 이중언어교육과 농문화를 가르침으로 농학생들에게 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고 농인으로서 긍지를 살려줄 수 있는 이중문화교육의 실시를 제언하였다. 농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농교사의 대거 기용을 촉구함은 물론 농학교 교장의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서 농교육 경력이 있는 분을 교장으로 발령해줄 것을 촉구하고 농학생 수의 감소 현상의 원인으로 꼽히는 일반학교에서의 통합교육에 대해서 재고해 줄 것을 제언하고 하단했는데 참석자들로부터 과연 얼마나 많은 호응을 얻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의 발표 내용은 지난 주에 올린 “농아인 입장에서 농교육 발전을 위하여 드리는 제언”이라는 제목의 글에 나와 있으니 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늦은 시간에도 끝까지 남아 나의 발표를 경청해준 일부 농인 참석자들이 정말 시원한 발표였다고 칭찬해주어서 긴장과 피로가 가시는 듯한 유쾌한 느낌을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상임 대표를 맡은 최참도 교장이 마지막으로 폐회사를 할 때 농문화에 대한 존중을 천명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한국 최초로 구화학교를 설립한 최병문 교장이 아닌가. 구화주의를 열렬히 지지하고 권장하다보니 수화주의에 대해서 지나칠 만큼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 분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최참도 교장도 구화주의의 열렬한 신봉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한국구화학교 학생들이 수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교육 방침을 고수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분이 놀랍게도 농문화에 대해서 존중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다행히 그의 일본 친구의 일화에서 그 정황을 포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는데 내용인즉 아버지하고 아주 친한 일본 구화학교 교장으로 지냈던 오오시마 교장의 아들도 아버지 대를 이어 현재도 구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데 그 오오시마 교장(아들)이 언제부터인지 수화에 관심이 생겨 수화를 배우려고 수화학회에 가입해서 연구를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아마 최참도 교장 입장에서 둘도 없는 동지라 할 수 있는 오오시마 교장이 수화를 배우겠다고 하니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대세이다. 대세는 몇몇 사람들이 가로 막겠다고 서서 버틴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농인들이 구사하는 시각 수동 언어인 수어의 언어로서의 효용성과 가치는 속속 인정되고 있으며 많은 나라들에서 수어를 국가적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대세이기 때문에 섣불리 반대하다가는 깔려 죽기 십상이다.


나는 최참도 교장이 농문화를 존중한다는 발언에서 그의 작으나 의미심장한 변화를 감지했다. 내가 발표를 할 때 수어통역사가 나의 수어를 정확하게 음성으로 통역할 자신이 없다고 주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직접 동시에 말과 수어로 발표한 바람에 최참도 교장이 구화주의의 승리라고 우길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구화주의자로서 어느 정도 체면이 섰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변화를 보고 그 분의 정직함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화주의가 배출시킨 성공적인 농인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건축설계사 박창권, 군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서교석 선생, 청음 보청기 사장 여윤수, 한국농아인협회 이사를 재직한 여인수 등은 농사회에서 성공한 구화인으로 꼽힌다.) 구화주의는 계속 수화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할 명분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구화주의나 수화주의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는 만큼 서로 장점을 존중해주고 활용함으로 농학생들의 저조한 학업 성취도를 괄목할 수준으로 향상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청각장애인이라는 명칭은 농인 뿐 아니라 난청인도 아울러서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것이니 만큼 구화주의가 효율성을 발휘하게 하는 청각장애인들이 있는 동시에 수화주의가 먹혀들어가는 청각장애인들도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은 상존한다. 청력 손실도가 심한 농인들의 경우 구화주의보다는 수화주의가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많은 나라에서 관찰되어지고 있어 농인 협회 같은 농사회의 대표적 단체에서 수화주의를 옹호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구화주의의 혜택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청각장애인들이 있어 마치 견원지간(犬猿之間)처럼 상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구화주의자도 언젠가 농인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어로서의 수어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수어를 축으로 한 농문화를 존중해주고 스스로 그 문화의 풍성한 혜택을 즐길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고 싶다.


한국청각장애교육 10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주관한 임원들이 거의 전부가 청인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라 그렇기 때문에 농인들이 다소 소외 당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 그 행사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지만 앞으로 한국농교육 200주년을 맞이할 지음에 행사를 주관하는 주체가 청인이 아닌 농인 혹은 청각장애인으로 구성되어 농교육 혹은 청각장애인 교육은 농인 혹은 청각장애인이 책임진다는 자신감을 만천하에 과시해 보일 수 있기를 기대해보고 싶다.


과연 이런 기대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하나의 희망사항으로 치부하게 될지 아닐지는 내일 일을 예견할 능력이 없는 내가 뭐라 장담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농교육 혹은 청각장애인교육이 성공하느냐 혹은 실패하느냐에 따라 농교육 현장에서 농인 혹은 청각장애인들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농교육이 성공해야만 농인들의 역량은 불가피하게 강화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농교육 백주년을 맞이하면서 농교육 발전을 위해 드리는 제언

I. 머리말


일찍이 1909년에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 평양에서 농인을 위한 특수 교육을 실시한 것이 한국 농교육의 효시가 되었으며 올해가 바로 농교육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가 되는 것이다.

한국 농교육 100주년을 맞이하여 농아동 및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일선 교사들과 농교육학의 질적 발전을 위해 연구를 쉬지 않으신 농교육학 학자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농교육은 초창기에 비해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실패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농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농인들의 평균 실력이 일반 초등학교 3, 4학년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미국의 연구 결과가 농교육의 참담한 실패를 보여주고 있는데 한국의 사정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농교육의 실패는 교육의 대상자인 농인들의 장애의 성격을 고려할 때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청인들은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 청력의 활용을 전제로 하지만 농인들은 언어 습득에 결정적 역할을 해주는 청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학업 성취도가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농교육에 쏟아 부은 투자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다고 해서 앞으로 개선의 여지가 없는 무망한 교육 분야라고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농교육도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현재도 뛰어난 사회적 학업적 성취를 보인 농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청각장애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농인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변호사, 교수, 국가 공무원, 심지어 치과의사로 활약하고 있는 농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괄목할 만한 활약상을 보이는 농인이 소수에 불과해서 미국에 비해 한국의 농교육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본인은 농인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현역 목사로 농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이나 연구 실적이 없지만 과거에 농학교에서 교육을 직접 받아본 적이 있을 뿐 아니라 목회를 하는 동안 많은 후배들을 만나면서 이들을 통해서 농교육의 문제점과 현주소에 대해서 소중한 정보를 입수할 기회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농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부족한 제가 한국 농교육의 발전을 위해 제언할 기회를 허락받게 되어서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저의 부족한 제언이 결과적으로 앞으로 농교육의 질적 발전과 개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II. 농교육 개선과 발전을 위한 실제적인 제언


본인은 아까 밝혔듯이 농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교육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도 아니지만 농교육의 발전이 결과적으로 농사회의 질적 향상을 가져온다고 믿을 정도로 농교육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농교육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깊은 편이다. 그러면 농인 입장에서 한국의 농교육 개선을 위해 드리고 싶은 제언은 아래와 같다.


1. 이중언어 교육(Bilingual Education)의 실시

농교육의 성공의 관건은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전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농교육 현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농교육사를 통해서 수화법과 구화법이 대립각을 이루며 서로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음을 보게 된다. 미국 농교육사는 수화법과 구화법이라는 판이한 이데올로기의 논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은 순수한 농인 입장에서 볼 때 눈과 손을 활용해서 구사하는 수화법이 온전하지 못한 청각에 의존해야 하는 구화법보다 습득이 훨씬 용이하고 의사소통에 유리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농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농인이 나중에 주류 청인 사회에 참여해서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지식과 능력을 배양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청인 주류 사회에서의 성공적인 적응을 위해 주류 청인의 언어 즉 국어 구사 능력이 좋아야 하는데 과거 많은 교육가들은 수화법보다 구화법이 국어 실력 증대에 효율적이라고 보았으며 실제로 1880년 밀란에서 열린 국제농교육자대회에 참가한 농교육자 대표들 대부분 구화법이 농교육의 최선의 대안이라 주장하고 구화법 채택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지만 결함이 있는 농인의 청각에 의존해야 하는 구화법의 한계성 때문에 기대만큼 좋은 성과가 나타나지 못하고 고전하다 토탈 커뮤니케이션(total communication)이라는 새로운 교육철학이 등장하면서 구화법은 점차 인기를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많은 농교육자들은 청인 주류 사회의 언어인 국어 실력 증진에 수화법이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수화법을 선뜻 채택하지 못하고 과연 어떤 방법이 최선이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과연 없는 것인가? 1980년대에 미국에서 이중언어교육(bilingualistic education)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는데 이 교육의 핵심은 농아동들에게 먼저 수어(sign language)를 익히게 한 다음에 미국의 국어인 영어를 제2의 언어로 가르쳐야 효과적이라는 것이다.(Johnson, Lidell, & Erting, 1989) 농인들에게 있어 수어(手語)는 모어(母語)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월하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언어이다. 수어를 마스터한 다음에 주류 청인 사회의 모국어인 음성 언어를 기초로 한 영어(한국의 경우 한국어)를 제2의 언어로 가르쳐 익히게 하는 것이 농인들의 언어습득에 아주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생겼으며 특히 농인 학자들 간에 지지가 높은 편이다. (Conference Proceedings of Bilingual Considerations in the Education of Deaf Students: ASL and English, 1990) 결국 한국인에게 한국어가 모국어이지만 한국 농인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바른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해야만 이중언어교육의 효율성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중언어교육의 효과는 여러 나라에서 확인되고 있다.(Heiling, 1998) 본인은 목회자인 관계로 한국에서 이중언어교육이 실시되고 있는지 자세히 아는 바가 없지만 농아동이나 학생들에게 먼저 익히기 쉬운 수어를 가르친 후 유창한 수어 구사 능력을 토대로 해서 한국어를 제2의 언어로 가르치는 것이 상당히 효과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며 제가 농학교 교사라면 이러한 방법을 시도해보고 싶다.

농아동에게 농인의 자연스러운 언어인 수어를 익힐 기회를 거부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학대(communication abuse)요 커뮤니케이션의 폭력(communication violence)라고 보아야 할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Jankowski, 1997)

현재 농학교 교사들 중에 유창한 한국수어 구사 능력을 소지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바 없지만 교육의 성패가 커뮤니케이션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면 농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수어 실력 증진을 위한 재훈련이 절대 필요하다고(Johnson, Liddell, & Erting, 1989)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2. 농교사의 대거 채용

거듭 강조하거니와 농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는 것은 교사와 학생들 간의 의사소통이다. 미국에서는 농학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지적 발전과 학업의 진전에 도움이 되는 의사소통의 형태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으며 구화법 보다는 수화법이 더 좋은 결과를 도출했다는 연구 보고가 많이 나왔다. (Delaney, Stuckless, & Walter, 1984; Crittenden, Ritterman, & Wilcox, 1986; Grove & Rodda, 1984) Quigley와 Paul은 미국수어(ASL)가 농인에게 자연스러운 언어임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미국수어가 농인에게 훨씬 습득하기 쉽고 사용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관찰되었다.(Quigley & Paul, 1984) 수화법이 구화법보다 이해를 훨씬 촉진시키며 따라서 수화법에 익숙한 농아동들이 구화법에 익숙한 농아동들보다 학업 성취도에 있어서 더 나은 결과를 보였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수어가 농학생의 긍정적인 자아관 확립에 기여할 수 있는데 Gibson-Harman 과 Austin은 “일반 학교에서의 자아 개념과 학업상 성취의 상관관계가 여러 연구에서 보고되었다”고 하였다.(Gibson-Harman & Austin, 1985) Koelle와 Convey가 농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긍정적인 자아관을 가진 학생들이 그렇지 못한 학생들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하였다고 발표했다.(Koelle & Convey, 1982) Kannapel은 미국수어가 자신의 정체성 의식을 강화시켜주고 보다 긍정적인 자아관 확립에 기여해준다고 보았다.(Grimes & Prickett, 1988)

여기서 수어의 능숙한 구사 능력에 있어서 농교사가 청인 교사보다 유리한 고지에 점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농교사의 채용이 농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없다. Andrews, Green, & Walterss 그리고 Vernon은 농학교에서 농교사와 농교장을 채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는데 (Andrews, Green, & Walters, 1985; Vernon, 1984; 1985) Andrews 외 2인은 농교사의 채용이 농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한다고 확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Andrews, Green, & Walters, 1985) Serwatka, Anthony, & Simon은 농교사와 청인 교사의 교사직 수행에 있어서의 효율성을 조사해보았는데 두 가지 방법 즉, 플로리다 수행 측정 시스템과 학생들의 평가를 통해서 조사를 해본 결과 농교사가 청인 교사보다 좋은 점수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Serwatka, Anthony, & Simon, 1986) Martin(1984)은 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서 농학교 교사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자질로 과거의 농학교에서의 체험과 다른 농학생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꼽았는데(Martin, 1984) 이러한 자질은 역시 농교사가 청인 교사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고 판단된다. 농아동이나 학생들의 사회 심리적 정체성이 공통한 특성을 공유한 성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발달될 수 있기 때문에 농교육 프로그램에서 농교사를 많이 채용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Stevens는 주장하였다. (Moulton, Roth, & Tao, 1987) Moulton, Roth, & Tao는 “오직 더 많은 농교사를 채용하고 농사회로 하여금 농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강한 목소리를 내야만 우리는 농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자결(self-determination) 의식을 장려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Moulton, Roth, & Tao, 1987) 그뿐 아니라 청력상실에서 비롯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농교사가 청인 교사보다 더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Vernon, 1984) 확실히 농교사는 스스로 청각장애를 입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를 공유한 농학생들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있어서 청인 교사보다 훨씬 유리함을 자랑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농교사들의 가장 현저한 잇점은 탁월한 수어 구사 능력이다. 수어는 농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언어임을 고려할 때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농아동이나 학생들에게 수어로 수업을 진행시킬 때 농학생들의 이해도가 높아지게 되고 교과 내용에 대한 높은 이해가 학업 성취도의 고양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없다.

이렇듯 농교사는 다양한 형태로 농학생들의 학업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길 수 있고 특히 농교사는 농학생들에게 둘도 없이 훌륭한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수의 농교사의 과감한 채용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농교사의 채용을 어렵게 하는 장애요인으로 교사 자격 고시에서의 농교사 지망자들의 저조한 합격률을 들 수 있는데 (Moulton, Roth, & Tao, 1987) 농교사만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리한 강점들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교사 자격고시에 응시하지 않더라도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농교육 혹은 특수교육과를 양호한 성적으로 이수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특별 채용하는 특혜를 허용하는 것이 농인이 감수해야 하는 불리한 핸디캡을 감안할 때 극히 공평한 처사라고 판단된다.

미국의 경우 농학교에서의 농교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40퍼센트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싶다.


3. 이중문화 교육(Bicultural Education)의 도입 및 실시

수어를 제1언어로 청인들이 사용하는 음성언어인 한국어를 제2언어로 해서 교육시키는 이른바 이중언어 교육의 효율성이나 당위성이 제대로 인정된다면 이중문화 교육도 농교육 현장에서 필히 도입되어져야 한다. 이중언어교육과 이중문화교육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중문화 교육이라 함은 농아동이나 학생들에게 농문화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청인 문화에 있어서 청각장애는 부정적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과거에 비해 많이 완화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농인에 대한 태도가 부정적인 탓으로 농인들이 청인 주류 사회에서 종종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는 것이다. 청각 장애로 인해 소리를 청취할 수 없고 발음이 부자연스러운 농인들이 청인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애로를 겪다보니 소외감에 시달리게 된다.

농아동이나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부정적인 자아관은 자생적이라기 보다는 환경적 소산이라고 보아야 한다. Valshiner는 ‘발달’을 한 조직체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기초로 해서 일어나는 구조적 변형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Valshiner, 1989) 그렇다면 인성의 발달은 환경의 심각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많은 농아동이나 학생들이 유지하고 있는 부정적 자아관은 청인 문화의 왜곡되고 편견에 찬 차별적 태도의 영향에 기인한 것이라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사회심리학적 지지를 갖는데 Vygotsky는 개인과 사회환경의 엄격한 분리를 부정하면서 (Cole, 1985) 모든 심리학적 과정은 본래 아동과 성인 사이에 전개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주장했다.(Brown & Ferrara, 1985) 그에 따르면 인식 발달 이론은 내면화(internalization) 개념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내면화 과정에서 처음에는 성인이나 아는 게 많은 동료가 어린이의 활동을 지배하고 제어한다. (Brown & Ferrara, 1985)

농아동이나 학생들의 자아관이 청각장애에 대해서 다소 편견적인 청인 문화에 의해서 부정적으로 채색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농문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적 적응 능력은 문화라는 범주에서 가장 잘 발휘되는데 Bullivant는 문화를 정의하기를 “한 그룹의 환경 안에서의 생존과 적응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하였다. (Bullivant, 1989)

농문화 교육을 통해서 농학생들의 긍정적인 자아관 확립에 도움이 되며 청각장애에 대한 개념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정당화하여 농인들의 생존 능력을 배양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농문화는 청각장애를 비병리화(depathologizing deafness)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시도는 Woodward가 강조했듯이 농인들의 문화적 가치의 관점에서 이해함으로 농인과 청인 사이에 발견되는 상이성을 청인의 표준에서 이탈한 비정상적인 것이라기보다 문화적 차이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Woodward, 1982)

그러면 농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인이 무엇인가? 농인의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인 수어(sign language)가 가장 중요한 동인으로 꼽힌다. Bullivant가 지적했듯이 “문화의 계승과정의 핵심은 사회 그룹의 언어”이다. (Bullivant, 1989) Kannapel은 수어가 농인으로서의 정체감(sense of identity)을 강화시키고 긍정적인 자아관을 확립시켜 준다고 보았다. (Kannapel, 1980)

만일 이중언어교육의 핵심이 농아동이나 학생들에게 수어를 제1언어로 한국어를 제2언어로 교육시킨다는 것이라면 이중언어교육은 불가피하게 이중문화교육 즉 청인 주류 문화뿐만 아니라 농문화도 취급하는 교육으로 연결할 수밖에 없다. 농문화 교육은 농역사(deaf history), 농문학(deaf literature), 수어 문화, 농인 행동 규범, 농인 편의 시설과 장치의 이용에 대한 상식 등등을 다룰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농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자아관 확립은 물론 농문화에 대한 긍지를 통해서 자신감을 배양시키고 궁극적으로 청인 주류 사회 속에서 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농문화 교육을 통해서 농아동이나 학생들에게 능력 부여(deaf empowerment)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특히 1988년 3월에 발생했던 갈로뎃 대학 학생들의 “Deaf President Now" 시위 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갈로뎃 대학 사상 최초로 청각장애인이 총장으로 취임하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던 것은 이중문화 교육의 결실에 다름이 아니다. Deaf President Now 시위 운동의 여파로 많은 농인들이 청인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청인 주류 사회의 농인에 대한 인식의 획기적인 개선에 도움이 된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 시위 운동 이전에 미국의 농학교 중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농인이 4명에 불과했으나 시위 운동 후에는 20명으로 5배가 늘어났으며 농학교에 채용된 농교사의 수도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Jankowski, 1997)

한국 농교육 현장에서 농문화 교육이 실시될 수 있도록 농문화 교육 커리큘럼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가 되는데 우선 농교육학과를 가르치는 대학에서 농학과(deaf studies)를 개설하는 것을 심각히 그리고 긍정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4. 농학교 교장의 전문성 강화

본인은 국립서울농학교 출신으로 그 학교 초등부에서 고등부까지 12년을 재학하였다. 아직 미국처럼 농인 교장을 맞아보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한국의 상황이나 여건상 농인 교장 출현은 시기상조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명색이 농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역대 교장들 중에 농교육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인사가 과반수를 넘어 농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성의하고 이상한 조치로 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이중언어교육을 도입하고 있는 농학교 교장치고 수어를 못하는 분이 거의 없다. 다행히 농학교 교사로 출발하다가 교장으로 승진한 분이 몇 분 있지만 (서울의 이용수, 김장환, 김삼찬 교장 그리고 부산의 김영순 교장) 대개는 농교육 경력이 전혀 없는 분들이 부임하는 경우가 많고 설상가상으로 이들의 부임 기간이 1년 남짓 짧아서 과연 농교육 내지 농학교 발전을 위해 비젼과 구상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며 그냥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하다 정년 퇴임하는 사례가 많아 교육부의 농교육 발전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차제에 교육부 산하에 농교육 전문 학자와 농교육에 다년간 종사한 교사나 교장 그리고 농인 대표가 참여하는 가운데 농교육 분과 위원회(commission of deaf education)를 존치해서 농교육 발전에 대한 연구와 평가를 담당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


5. 통합교육의 재고

본인은 농학교 학생 수의 감소 현상에 크게 우려하고 있는 바 그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의술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농인 출현의 감소요 둘째는 통합교육이다.

통합교육이란 농학생을 일반학교에 재학시켜 일반학교 어린이나 학생들과 어울려서 함께 교육받도록 하는 것을 일컫는데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통합교육이 과연 농학생에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통합교육의 부작용을 들라면 농학생의 사회성 결여 및 소외감 증대, 청인 학생들과의 현격한 실력차, 농학생의 자기 정체성 혼란, 등을 들 수 있다. Ramsey가 실시했던 통합교육의 교육적 성과에 대한 장기 연구를 보면 그 성과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Ramsey, 1997) 그나마 농학생들만 수업하는 격리반에서의 교육이 청인 학생들과 함께 수업하는 교육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Ramsey, 1997)

통합교육의 실시로 인해 농학교의 존속에 위협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농학교의 폐교는 나중에 농사회의 존립을 위태하게 만드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동인을 제공할 수 있으며 농사회의 위상 약화는 궁극적으로 농인 개개인의 복지에 암운을 던질 수 있으므로 통합교육을 강력 반대하는 바이다.

통합교육 하에서 이중언어교육은 물론 이중문화교육이 실시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농학생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농사회에서의 적응에 어려움을 줄 소지가 다분하고 농사회 적응에 실패할 경우 농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청인 주류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이중 사회 적응 부진자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청력이 농이나 중증 난청인으로 나타난 아동이나 학생은 농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함으로 통합교육을 통해서 농학생들이 입게 될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III 맺는 말


이상과 같이 한국 농교육의 발전을 위한 제언을 내놓았다. 아직도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농교육의 현실이지만 헌신적이고 사명감 있는 농학교 교사들이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농교육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의 진지한 연구열이 뜨거운 바 있기 때문에 한국 농교육의 전망은 밝다고 낙관적으로 보고 싶다. 다만 농인 입장에서 불만스러운 내용과 개선을 위한 제언을 위에서 말씀드렸는데 바라옵기는 농학교나 농교육학자들이 농인의 입장과 관점을 충분히 수용함으로 농교육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겨 많은 농학생들이 혜택을 받음으로 우수한 농인 인재를 많이 배출함으로 이들이 성공적으로 일반 주류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동시에 이들이 멸시 천대 편견에 희생되기는 커녕 인격적인 대우와 경의를 받으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공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농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과 농교육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의 노고를 감사드리면서 세계 최고의 농교육의 이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과 분발을 촉구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농을 치유하려는 잔혹한 역사

하나님이 지어주신 청각 장애를 이 지구상에서 완전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청각장애를 치유함으로 농인을 청인으로 전환시키려는 집요한 노력은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다.

파리 농학교에서 레지던트 의사로 일했던 쟝 마르크 이타르(Jean Marc Itard)의 후임자인 프로스퍼 메니에르(Prosper Meniere) 박사가 1853년에 쓴 글을 보면 청능주의적 의학적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농아인들이 모든 면에서 청인들과 대등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관용을 취하고 농인을 청인으로 변환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믿든 간에 청각장애는 질병이요 따라서 농인이 그것 때문에 근심하든 않든 상관없이 우리가 반드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이 청능주의자들 간에 현저하기 때문에 프로스퍼 메니에르 박사가 농인들이 듣지 못하면서도 태연하다는 사실에 속이 뒤집히는 듯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이타르(Itard)는 농아인의 귀를 고치기 위해서 거의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그는 어떤 이태리 외과의사가 개구리의 다리에 전기가 흐르는 쇠조각을 대면 수축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의 농학생들의 귀에 전류를 가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사지의 마비와 청각기관의 마비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국지(局地) 출혈이 청력에 도움이 될까 해서 거머리를 농학생의 목에다 붙여놓기도 했다. 여섯 명의 학생은 자신의 고막을 뚫는 수술을 받았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한편 성과는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수술을 단념해야 했다. 왜냐하면 한 학생이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베르사이유에 사는 한 우체국장이 자신의 목구멍에서 귀로 통하는 유스타키 관(Eustachian tube)에 급유용 파이프를 삽입해서 임파액을 배수시킴으로 자신의 청력 상실을 고쳤다는 사례에 자극받아 은으로 만든 긴 파이프를 개량해서 120명의 학생들에게 실험을 실시해보기도 했다. 토마스 갈로데 목사와 함께 미국 최초의 농학교를 설립하는데 일조한 위대한 프랑스 농인 교사 로랑 클레르도 그 실험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때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했다. “은으로 된 긴 파이프를 내 코 속으로 삽입하더니 나의 유스타키 관을 관통할 때까지 앞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고통이 너무 격심해서 내가 울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고백하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파이프를 통해 액체가 내 머리 속으로 퍼졌을 때 나는 어지러워지고 구토할 것 같았다. 이렇게 하기를 몇분간 한 후에 파이프는 빼냈으며 나는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나는 매번 같은 실험을 (모두 여덟 차례였다.) 받은 후에 두통, 현기증, 그리고 발열에 시달려야 했다."

그 다음에 선청성 농이 아닌 학생들의 귀 속에다 비밀로 주조된 주류(酒類)를 하루에 몇방울 씩 두 주일이나 계속 떨어뜨려 보았다. 역시 별무신통이었다. 또한 수포를 내게 하는 약을 적신 붕대로 학생들의 귀를 감싸게 하니 며칠 후에 귀는 피부가 벗겨지고 고름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 통증은 매우 극심했다. 나중에 그 피부에 딱지가 앉았을 때 이타르는 다시 붕대를 감쌈으로 상처가 재발하게 하였다. 이렇게 반복해서 귀부분의 피부에 톡톡 쏘는 신랄한 소다수를 바르는 실험을 해보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더욱이 망치로 귀의 뒷부분을 가격함으로 일부 학생들의 머리뼈를 골절시키기도 했다. 그밖에 끔찍한 실험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그는 농아인의 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벼라별 실험을 동원해서 실시해보았지만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다.


이타르는 “의술은 죽은 자에게는 효력이 없는 법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농인의 귀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 과학이 그 귀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하고 탄식하면서 내키지 않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의 실험은 끔찍하고 무자비하고 고통스러워서 인권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지만 인권 의식이 아직 확립하지 못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런 무시무시한 실험을 한 것이 이타르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문제는 아직도 청각장애를 제거해야 할 질병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청인들 특히 청능주의자들 사이에 완강히 뿌리박혀 있어 그 때문에 많은 농인들은 엄청나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침 시술을 6개월이나 받아보았는데 어린 나이에 침을 맞는다는 것은 가히 공포스러운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무섭고 지긋지긋한 침 시술을 매일 받아야 할 만큼 청력을 회복하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하는 데 회의를 자주 느꼈으며 그냥 농아가 되는 것이 이렇게 아픈 침을 맞으면서 청력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뜻을 부모님께 솔직히 밝힌 적이 있었다.


내가 아는 선후배 중에 귀 뒷부분에 구멍을 내는 수술을 받은 이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들이 기대했던 청력회복은 고사하고 큼직한 흉터를 막기 위해 하얀 솜을 끼어넣어야 했기 때문에 창피를 느껴야 함은 물론 수술의 부작용으로 안면 근육이 비뚤어지는 등 외모를 망치기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얼마나 고민스럽게 보내야 했을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처럼 농을 고치려는 집요한 노력은 21세기에 와서도 사라질 줄 모르고 있으니 다름 아닌 인공와우수술이다. 인공으로 만든 와우를 귀 뒷부분에 삽입하는 수술을 일컫는데 그 수술의 결과 청력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는 보고가 있지만 사람의 말소리를 완전히 식별하는데 아직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을 완전히 해소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금속으로 된 작고 정밀한 쇳조각을 귀 뒷부분에 삽입하기 때문에 마치 로봇이 된 것 같은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 예민한 귀 뒷부분 신경과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작은 충격을 받으면 굉장한 통증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공와우를 삽입한 가운데 기대만큼 사람의 말소리를 완전히 정확하게 식별할 수 없고 그저 주위의 소리를 여과없이 흡수하면서 싫든 좋든 들음으로 소음공해에 시달려야 하고 작은 충격에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과연 인공와우 수술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에 하루에 여러번 지긋한 인공와우를 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과연 하나님이 지어주신 농을 치유하는 것이 절대선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자신있게 답할 수 없다. 이는 농을 고치려는 일련의 시도가 예외없이 잔혹했기 때문이다.


- 5차 마지막 서면 인터뷰 -


 박창후> 이번은 사실상 마지막 5차 인터뷰라고 할 수 있으니 다소 좀 길어진 질문들을 드릴 지도 모르니 이 점에 대해 양해 좀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중앙회를 비롯한 협회와 지부들이 “삼성의 실체”에 대해 잘 모르거니와 삼성청각도우미견에 대해 아무 생각(의식의 빈곤이라기보다는 사회인식의 마비)없이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입장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6월3일 농인의 날에는 “삼성도우미견 무상 분양식”도 그렇고, 삼성 관계자들도 초청하는 것도 그렇고 연례적으로 “삼성청각도우미견 센터 견학”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삼성은 워낙 이미지가 좋아서(실은 거의 다 세련된 광고기법에 기인한 바도 있겠지만요. 돈의 힘도 워낙 크구요) 추한 뒷모습은 거의 보지 못합니다. 잘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정의구현사제단에 소속되어 있는 한 신부가 거의 드물게 안식년을 강제적으로 당하셔서 지금 쉬고 있습니다. 그 신부가 삼성을 집중적으로 비판한 대표적 신부님이십니다. 경찰, 검찰, 청와대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삼성이 심지어 천주교까지 움직였으니 이 정도면 대단하고도 무서운 회사가 아닐까요. 한때 삼성에 비판적인 진보언론으로 분류되어 있는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일부러 광고 안 주는 등 자금줄을 조여가니까 한겨레가 비상운영위원회까지 열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삼성이 매우 지능적입니다. 하필이면 현 시점에서 삼성이 그렇게도 중요하느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중부 하이닉스 전자도 농인들을 수십여명씩이나 정규직으로 채용했으며, 남부 엘지전자도 농인들을 수십여명씩이나 채용하는 등 실질적으로 그들의 자립심과 경제력에 이바지한 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울 근처에 있는 수원 삼성전자 공장이 농인을 뽑았다는 소식은 여태까지 들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성전자 공장이 수준 높은 사람들만 뽑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부 고졸출신 여자들이 삼성전자 공장에 3교대씩으로 일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고 자기 치장에 투자하거나 나이트에 가서 백수들에게 뿌려주는 등 그렇게 하는 게 요즘의 현실입니다. 엘지전자, 하이닉스전자도 농인을 정규직으로 뽑혀주고 있는 이러한 현실에는 삼성만은 꼿꼿하게 안 뽑혀준다고 버티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인들에게 돈만 줄 수는 있어도 자기 공장 생산직에 정규직으로 들어오는 건 용납 못한다는 게 삼성전자의 비공식적 입장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 노조는 안된다는 이병철 회장의 유언을 삼성 체제가 철석같이 지키고 있는 “무노조 신화의 경영”을 고수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정신과도 아슬하게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목사님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농인의 빈곤에 대해 염려하시곤 합니다. 여러 글을 통해 발표하신 바가 있으나, 구체적으로 삼성에 대해 직시하지 못한 건 알고도 모른 척하시는 건지요? 아니면 내 주장이 있기 전에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계시다가 내 주장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삼성의 실체에 대해 비로소 알고 계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삼성전기(삼성전자와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가 농인을 뽑혀서 훈련을 하고 있다느니 삼성과 삼성도우미견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느니 이러한 본질 흐리기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공단에 일하는 농인들의 주장인데 아주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그 비뚤어진 정신 때문에 취직 자체가 막혀서 호떡장사, 건설 노가다 등 이러한 비극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그들은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백인화된 흑인이 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청인화된 농인이 되지 말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삼성에 대해 앞으로 비판할 용의가 있으신지요?


강주해 목사님>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으로 우뚝서 있는 삼성에 대한 비판은 얼마전 서울농아인협회 자유게시판에 실린 오 모씨의 글을 보고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도 역시 삼성도우미견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올해 1월말에 귀국했기 때문에 삼성 문제에 대해서 언제부터 누가 불만을 제기하고 항의를 했는지 소상히 파악이 안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 가기 전에도 삼성 회사가 농인을 고용하는데 매우 인색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매우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이 장애인 고용에 소극적이라는 사실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대기업들 치고 장애인 고용에 소극적인 기업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애틀에 본부가 있는 보잉 회사는 점보 비행기를 제작하는 큰 회사입니다. 거기에 많은 장애인 특히 맹인들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삼성 회사는 알고 있는지요? 노키아라는 회사 또한 핀란드에 있는 세계 굴지의 휴대폰 회사입니다. 휴대폰 세계 점유율이 최고를 고수하고 있어 유명합니다. 그 회사에도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남다릅니다. 장애인 고용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지만 제가 전에 세계농아인연맹 이사로 재직할 때 핀란드 헬싱키에 간 적이 있었는데 회장이 핀란드 사람이라서 핀란드 농아복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았습니다. 그 나라 대기업들의 농아협회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적극적이어서 선망의 눈으로 그 나라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오래 살아보았기 때문에 잘 알지만 유명한 회사들 중에 장애인 고용에 인색한 회사가 별로 없습니다. IBM하면 유명한 컴퓨터 회사입니다. 거기에서 일하는 농인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대기업뿐 아니라 정부 기관에도 많은 농인들이 진출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최고의 기업 삼성에서 농인 고용에 인색하다는 것을 세계가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놀랄 것입니다. 어쩌면 속으로 경멸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돈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집니다. 종일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머리를 짜내는 곳이 기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기업이 점차 인정이 메말라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비인간화에 염증을 느낀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공산주의를 주창한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많은 외국 대기업들은 돈 벌이에만 혈안이 되면 인정이 메말라져 갈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휴머니즘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칫 돈 때문에 인정이 메말라 갈 수 있는 기업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 인정을 심어야 한다는 운동이지요. 이런 휴머니즘의 접목의 일환으로 장애인 고용에 적극 나서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업이 거둬들인 막대한 수익을 자선재단에 기부함으로 사회 빈곤층에게 부를 돌려주는 훈훈한 움직임을 우리는 신문을 통해서 들어보았습니다. 휴머니즘이 살아 움직이는 기업 정신의 구현, 이것이 구미 선진국 대기업들이 실천하고 있는 덕목입니다.


삼성이 장애인 고용에 인색하다는 것은 훈훈한 인정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기업이 참으로 존경할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봐야 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로 삼성의 이건희가 항상 수위를 차지해왔지만 저는 농인 고용에 소극적인 그의 기업 철학 때문에 존경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만일 기독교인이었더라면 목사인 제가 평가하건대 겉만 번지르르한 엉터리 기독교인이 되었을 뻔했을 것입니다.


삼성의 부당한 농인 고용 거부 문제는 어느 개인이 비분강개한다고, 불만을 제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강력한 법적 조치가 뒷받침되어야 시정이나 개선이 가능합니다. 작년에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발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이러한 법을 무기 삼아 삼성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농인 고용에 대한 요구를 즉각 수용하여 줄 것을 요청해야 합니다. 만일 협회가 이에 실패하고 있다면 협회 임원들은 무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삼성 문제는 우리 농인 사회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를 제기해주신 박창후 씨의 시의적절한 깨어 있는 의식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농사회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온갖 부조리를 지적하고 질타하고 시정과 개선을 강력히 요청하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목소리가 잠잠해지면 우리 농사회의 장래가 얼마나 암담할 것인지 불 보듯 뻔할 것입니다.


박창후> 일부 수화통역사들이 농통역사가 왜 있어야 하냐는 불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농통역사의 자질에 대해 의심스럽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요. 허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수화통역사들이 왜 농통역사와의 공존을 꾀할 생각은 하지 않을까 말입니다. 몇 년전, 농인에 대해 허용된 직업이 공식적 직업만 해도 1만여개가 넘지만, 다섯손가락에 들 정도로 몇 개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수화통역사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공식적 직업만 해도 무려 1만여개나 넘은데 왜 하필이면 수화통역사라는 직업을 택했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인연”이 아니냐고요? 그러면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결국 수화통역사들도 수화통역사라는 직업 말고 달리 갈 데가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럴 때 역지사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농통역사에 대해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하게 얘기해주고 또 도와주고 농통역사도 지적에 대해 받아들일 건 과감히 받아들이는 등 자기발전과 자기혁신이 있어야 겠지요. 수화통역사와 농통역사의 공존은 보다 성숙된 사회로 갈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봅니다. 사석에서 들려준 수화통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숨겨진 이야기들을 여기서 차마 옮기지 못한 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좋은 목사님들이 많지만, 문제된 목사가 극소수이고, 좋은 선생님들이 많지만, 문제된 선생님이 극소수이고, 좋은 수화통역사가 많지만, 문제된 수화통역사가 극소수일 뿐입니다. 극소수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해서 대다수를 피해입히지 말아야 겠지요. 수화통역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부분을 농통역사가 제대로 알아볼 수 있기에 농통역사라는 직업이 그래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처럼 사회적 진출이 꽉 막혀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려해볼 때 수화통역사가 공공연히 농통역사에 대해 불만이나 존재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냥 수화통역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9999개나 되는 나머지 직업을 알아보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수화통역사가 있지만, 농통역사가 없는 것 같은데요. 세계적으로 농통역사가 한국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요? 또 어떻게 보면 농식 수화가 매우 어렵고 난해하기 때문이라는 반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강주해 목사님>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농통역사 제도가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설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쌍수를 들어 환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에서 아마 초유의 일로 수어통역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시아 초유’라고 했는데 무엇이든 ‘세계 제일’ 혹은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미 미국에서 먼저 실시되었던 것이라 ‘세계 초유’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통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문 수어통역사가 취급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농통역사가 능숙히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수어통역사 중에 농문화에 대해서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에 농인 특유의 심리나 정서에 대해서 아직 익숙해 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어통역하면서 농인 특유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바람에 빚어진 오역 사고가 발생하여 농인 고객들의 불만을 사는 사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다름이 아닌 농통역사 제도입니다.


한국 수어통역사들 중에 농문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이 그저 수어를 익혀서 수어통역사 자격 시험에 합격하면 통역하는데 아무 문제 없겠다고 만만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준 높은 수어통역 서비스를 기대했던 농인 고객들의 불만을 많이 산 주요한 까닭으로 작용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농문화 체험을 수어통역 기술 연마보다 더 중시합니다. 아무리 유창한 수어실력을 소지했다 해도 농문화에 대한 이해나 체험이 없는 자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농문화에 대한 체험이 없는 수어통역사는 진정한 의미로 농인들의 이웃이자 벗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활약하는 전문 수어통역사들은 무늬만 청인이지 정신적으로는 농인에 가깝습니다. 농인처럼 생각하고 농인처럼 느끼고 농인처럼 행동합니다. 한마디로 농문화, 농세계를 사랑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농통역사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아주 편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이들 수어통역사들은 농인의 권익과 농인들의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청인 입장에서 보면 ‘변절자’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농문화’나 ‘농세계’를 끔찍하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청인보다 농인을 더 두둔하고 지지합니다. 한국 수어통역사들 중에 과연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질 때가 많습니다.


수어통역사가 농통역사와 함께 일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수어통역사 자격이 미달된 사람이라고 저는 감히 비판하고 싶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수어통역사의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이 바로 농문화나 농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인데 그런 애정이 있다면 농통역사의 등장을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마땅하기 때문이지요.


수어통역사 자격고시에 합격했다고 해서 이들의 수어통역 실력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칩니다. 마치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당장 차를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상당한 운전 실력을 갖추려면 오랜 시간 운전해봐야 합니다. ‘초보’ 딱지를 완전히 떼버리려면 아마 일년이 걸릴 것입니다. 일년이 지나도 아직 초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운전자들이 수두룩한데 하물며 수어통역 실력이 생각보다 빨리 늘지 못하는 수어통역사들이 전혀 없겠습니까?


수어통역사들에겐 농통역사는 자신들의 부족함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농통역사의 존재를 환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수어통역사가 홀로 통역하는 법이 없습니다. 최소한 2명 이상 번갈아 가면서 통역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수어통역사들은 혼자서 통역하는 것을 좋아하지 다른 통역사와 함께 일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공생공존’ 이것이 수어통역사들이 익혀야 할 삶의 지혜요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박창후> 어린이였을 때 양흥석 전도사, 이신홍(성북지부 농통역사 2007.7.10 심장마비로 사망), 엄태욱, 나 이렇게 4명이 을지로에 있는 영락교회 농아부에 성경공부를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나실 지도 모르겠지만, 목사님께서 그때 유치부 교사였는지 전도사였는지 알아볼 길이 없지만요. 사진 한 장(지금 분실이 되어 있지만)을 보면 참 흐뭇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칠판에 “베드로”라고 써놓으시고, 긴 양말을 신었고, 반바지 차림인 어린이였던 저한테 한참동안 설명하신 그런 사진 말입니다. 을지로에 있는 영락교회 농아부를 가기 위해 버스 용돈을 아껴가면서까지 누상동부터 지금 고인이 된 이신홍하고 같이 걸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당시 버스 값이 60원인데 140원만 더 보태면 새우깡 200원짜리 사먹을 수 있고, 팥빵 100원짜리도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동심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피식 나옵니다. 초등생 시절에는 독립문 영락농인교회 한미경 전도사(지금 무슨 밀알단체 목사랑 결혼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와 또 한명의 전도사(지금 해외로 선교나가고 있는데 나이가 많으신 여자분이십니다)가 우리집을 종종 찾아오는 등 농인 남자 전도사 보다는 청인 여자 전도사가 꽤 열정적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와서 내 부모님하고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시고, 저한테 교회 좀 오라고 하는 밝은 표정이 지금 기억이 납니다. 반면, 농인 전도사들에 대해 그다지 인격적 접촉은 거의 없었습니다. 손원재 전도사, 김용익 전도사, 정종규 전도사 등 이렇게 초등부, 중등부까지 가끔 다니면서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청인이신 두 여성분의 전도사에 비해 열정의 크기가 좀 부족했다고 봅니다. 비교하기가 좀 그렇지만, 잃어버린 양이 있으면 그 양의 집을 직접 찾아가는 게 전도사와 목사한테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본적 자질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엔 삐삐, 폰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몇주 동안 안 나오면 노심초사하면서 걱정한 전도사들이 직접 찾아가지만, 요즘 폰이 대중화되어 버렸기에 폰으로 연락해보고 쉽지 않겠다 싶으면 그냥 내버려둡니다. 옛날의 정하고 지금의 정을 비교해보면 불편하고 가난했지만, 옛날이 인정이 훨씬 더 넘친 사회가 아닐까 싶을 때도 많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도 정신적으로 갈수록 빈곤해지는 게 지금의 사회였고, 물질적으로 빈곤해도 정신적으로 풍요해지는 게 옛날의 사회였습니다. 아마 목사님께서도 흔쾌히 동의하시리라 믿고, 이 글을 읽으시는 30대~50대 독자들도 공감하시는 부분일거라고 믿습니다.


강주해 목사님> 박창후 씨의 어린 시절의 일을 읽으니 마치 저의 일처럼 느껴지는 게 꽤나 신기합니다. 그만큼 우리 둘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다는 의미겠지요. 제가 유치부 전도사를 맡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로 시작했다가 2년 후에 중고등부 전도사로 옮겼지요. (사진은 아마 제가 미국 유학 다녀온 후에 부목사로 있을 때에 촬영되었을 것입니다.) 초등부 교사로 재직한 기간이 길지 않아서 제가 지도한 어린이들을 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지금도 죄송한 부분으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기는 저나 저한테 지도 받은 어린이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초심은 언제나 순수하고 뜨겁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오히려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지적은 날카로우면서도 정확한 매우 철학적인 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국가별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세계 최고가 방글라데쉬였습니다. 제가 그 나라에 선교사로 계시는 조상희 선교사님을 위로하기 위해 거기 가본 적이 있어 잘 아는데 방글라데쉬는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만족도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행복과 만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엄연한 진리를 깨닫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건전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에리히 프롬이라는 유명한 사회학자의 책들을 즐겨 읽었는데 그 책이 요즘 서점가에 남아 있는지 몰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좋은 책들이라 생각됩니다. 에리히 프롬이 일관되게 주장하는바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정신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한미경 전도사님께서 심방 오셨을 정도로 열심이시라고 언급하여 주셨는데 저도 한 전도사님의 열심을 인정해줍니다. 유감스럽게 밀알 선교단에 들어가 활동하시는 바람에 영락농아인교회에 재직하신 기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요. 방글라데쉬에 선교사로 계시는 조상희 당시 전도사님도 심방을 꽤 많이 하실 뿐 아니라 정식 농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문맹 농인들을 발굴해서 교회로 인도하여 이들에게 한글 교육을 시키신 결과 영락농아인교회의 교인수 증가에 기여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주님의 종들이 계시기에 영락농아인교회는 그만큼 많은 발전과 부흥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명이 있으면 암이 있는 법입니다. 좋은 목회자가 있으면 좋지 못한 목회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경고하실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좋지 못한 목회자 때문에 교회의 성장에 암적인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 기준에 의하면 좋은 목회자는 양들을 사랑하고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지만 거짓 목회자는 양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이용하고 늑탈 착취하여 자신의 배를 채움으로 양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런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판단 기준에 따라 한국 농아 목회자들을 판단하면 누가 좋은 목사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대충 알 수 있겠지요.


제가 영락농아인교회 담임 시절 목사는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3가지 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즉, 공부방(책을 많이 읽을 것), 골방(기도 많이 할 것), 그리고 심방(교인 심방을 많이 할 것)입니다. 제가 매주 평균 출석 교인이 400명을 헤아릴 정도로 많은 교인들을 목양하는 동안 심방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침 8시에 시작해서 밤 10까지 20이 넘는 집을 심방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세수도 안하고 드러눕자마자 그냥 잠들어버리고 말더군요. 교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강행군을 감행할 엄두도 못냈을 것입니다.


요즘 심방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고 우려스럽습니다. 목회자들이 심방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탓인지 모르지요. 어쩌면 교인들이 심방을 원치 않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인들을 가까이 하고 그들을 더 잘 알기 위한 수단으로는 심방이 으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인간 사이의 정을 메말라 가게 만드는 것 같아 이것이 제게 늘 안타까운 대목으로 꼽힙니다.


박창후> 내 남매가 전부 농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듯이 목사님의 세 형제도 전부 농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막내동생이 되시는 강대해 씨에 대해 각별한 추억이 많습니다. 강대해 씨가 한국에 들릴 때마다 거의 농인 어린이들을 끔찍하게 아껴주는 그런 성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영락농인교회 야유회나 수련회에 갈 때 강대해 씨가 농인 어린이들을 직접 챙기려고 애를 쓰시는 걸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비단 강대해 씨뿐만 아니라, 현재 서울농학교 장진권 선생님께서도 수원서광학교에 재직하고 계셨을 때 나를 비롯한 농인 어린이들을 아껴주시는데, 세월의 무게인지 세상의 물정인지 시간이 갈수록 그 사랑이 점차 퇴색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농인 아이들도 다 변했고, 어른들도 다 변했습니다. 세상이 바꾸면 사람도 바꿉니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이 바뀔 수 있도록 사람도 좀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강주해 목사님> 사람이 변질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강대해나 장진권 선생은 총각시절 농인 어린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해주셨는데 지금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다 보니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꾼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전의 다정한 모습을 다시 보기 힘들어진 것인지 모르겠지요.


어쨌거나 사람의 마음은 넓을 것 같으면서도 실은 매우 좁을 때가 많습니다. 좁은 마음의 자리에 이미 가정이 점유해버렸기 때문에 농인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이 끼워들 여지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요. 좁은 마음의 자리를 넓히려면 종교의 힘이 필요합니다. 장진권 선생이나 강대해 씨가 종교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는 한 어린 후배들에 자상했던 예전의 면모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박창후 씨에겐 아쉬움이 되겠지만 인간이란 매우 변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예전의 좋았던 시절의 모습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동일하게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슬픈 모습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싫어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박창후> 을지로 영락교회 농아부 근처에 뱀탕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 있었는데, 유리창에 뱀이 득시글거리는 걸 신기하게 바라본 기억이 있었습니다. 아마 전형적으로 꽃뱀이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무늬가 알록달록 참 이뻤습니다. 좀 더 청계천을 가면 미싱공장, 피복 공장들이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정확히 80년대였으니까요. 5살~6살이었으니 1980~1981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목사님께서 어린이부 교사일수도 있고, 전도사일 수도 있겠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터널의 매캐한 공기를 피하기 위해 코를 움켜쥐고 통과하면서까지 독립문 영락농인교회 토요일 예배를 보기 위해 갔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로워집니다. 손원재, 김용익, 정종규 전도사 이렇게 3명한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지금 전부 목사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 감정이야 있을 리가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농인 3명의 전도사보다는 2명의 청인 여자 전도사한테 애틋한 그리움이 남은 건 웬일일까요? 그건 아마도 내 집을 찾아와서 대문 위에 고개를 빼꼼이 들어서 방에 있는 저를 쳐다보는 그 눈빛이 워낙 사랑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꼭 되찾아야 겠다는 절박한 눈빛은 곧 사랑 그 자체가 아닐까요. 지금도 가끔 한미경 전도사, 조상희 전도사가 그리울 때가 있긴 합니다. 그리움은 간직해야 진정한 그리움이 된다는 말이 있기에 굳이 여태까지 찾아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매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건필하시고, 그 두 여성분의 해외 선교사와 사모님을 만나뵙게 되시거든 꼭 안부의 말씀도 전해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조상희 선교사 최근 사진을 발견해서 이 곳에 올려봅니다. 한마디로 곱게 늙으셨습니다. 그 분의 영혼도 평화스럽게 느껴집니다.


강주해 목사님> 박창후 씨도 이런 아름다운 동심이 있다니 흐뭇하고 정겹습니다. 역시 동심의 세계는 순수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어린 시절의 일을 읽으니 제 어릴 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심금을 울리게 하는 동시에 눈물샘을 자극하게 합니다. 잠시나마 어릴 때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신 데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한미경 전도사님은 청인임에 틀림없지만 방글라데쉬에서 활동 중이신 조상희 선교사님은 중도 실청인이므로 엄밀히 따지면 농인 카테고리에 속합니다. 아니면 혹시 청인이신 이성희 전도사님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미경 전도사님은 현재 미국 뉴저지 주에서 밀알선교단 단장으로 수고하시는 강원호 목사의 부인이 되셨습니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셨지요. 영락농아인교회 전도사 시절 닦고 갈은 수어 실력을 활용하여 수어통역을 하고 수어교실을 운영 지도하고 계시지요.


조상희 선교사님은 방글라데쉬에서 선교사로 계시는데 그 나라는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자유롭게 전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농인 과부들을 모아서 수예품을 만들게 해서 여러 곳에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과부들의 생계를 보조해주고 있으며 가난해서 농학교에 들어갈 형편이 되지 않는 농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시키면서 조용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고 계십니다.


이성희 전도사님은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아서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어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하고 안타깝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날로 인정이 삭막해져 가는데 아직도 어린 시절의 순수한 추억을 간직하면서 개인적으로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무척 감동적입니다. 박창후 씨에게도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하.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부디 어린 시절의 순수한 초심을 고이 간직하시고 고마우신 분들에 대해서도 계속 감사의 정을 잃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살벌한 적자생존이 판치는 삭막한 세상에서 따스함과 여유를 찾지 못해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5차 마지막 인터뷰 끝 ---------------------


- 그러나’와 ‘でも(데모)’ 수화에서 나타난 농인의 의식 -

 한국 수화로 ‘그러나’는 오른손을 그 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했다가 곧 아래로 뒤집는 것으로 표현된다. 상황의 반전을 묘사하는데 제법 훌륭한 표현이다. 원래 그 수화는 일본 수화에서 따온 것이므로 ‘그러나’에 해당하는 ‘でも(데모)’ 수화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실제로는 두 수화 사이에 손의 동작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지만 손바닥의 방향에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일본 수화 ‘데모’는 오른손을 그 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했다가 곧 위로 돌리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한국 수화 ‘그러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수화 ‘그러나’가 마치 판을 뒤엎어 버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숨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위를 향하던 손바닥을 뒤엎어 질식시키듯 힘주어 아래로 누르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런 수화를 보면 숨 막히는 듯한 질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일본 수화는 한국 수화 ‘되다’와 동일한 동작과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손바닥의 방향의 차이 때문에 두 나라의 국민성에도 차이가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한국농아인협회와 일본농아연맹의 규모나 사업을 보더라도 일본이 한국보다 한 수 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농아연맹의 역사가 한국농아협회보다 장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본농아연맹은 한국보다 멀찌기 줄달음치듯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연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임에 틀림없지만 아마 일본 특유의 강점인 단결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일본 수화에서 보듯 ‘데모’는 한국 수화 ‘되다’와 동일하다. 일본 수화는 “안되면 되게 하라‘는 의지가 느껴진다. 반면 한국 수화 ’그러나‘는 가능성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우리 선배들의 억압과 차별의 쓰라린 경험을 반영하는 듯한 구슬프고 암울한 손짓인지 모른다.


 현재도 농인들의 취업 상황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아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한국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이 된 농인이 아직 없고, 하다못해 장애인 고용 촉진법을 모범적으로 시행해보여야 할 정부 기관에 취직된 농인 공무원이 있다는 소식을 못들어 보았다. 현재 한국 농인들의 취업은 단순 노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호떡 같은 노점상을 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지만 불법으로 영업한다는 이유로 단속이라는 법의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불량 시민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 그들에겐 매우 불만스러울 수 있다.


 국가에서 장애인들의 공평한 취업 기회를 보장하여 주지 않은 상태에서 호떡 장사라도 기본적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호구지책으로 인정하고 이를 합법화해주어야 하는데 농인들의 고달픈 삶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속반들이 계속 호떡을 파는 농인들을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 취급하듯 가차없이 단속하느라 혈안이 되고 있어 딱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그러나’를 표현하는 수화에 억압과 질식의 어둔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하다.


 원래 ‘그러나’는 상반이나 반전을 의미하는 접속사이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되는 것을 보여주는 접속부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뒤의 내용이 반드시 부정적일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유쾌한 반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나는 전에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뒤에 나오는 내용이나 결과가 긍정적으로 반전할 수 있다. 그래도 한국 수화 ‘그러나’는 그 표현의 느낌 상 유쾌한 반전이 가능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비효율적인 듯하다.


 그렇지만 발상의 전환이라는 것이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발상을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수화 ‘그러나’를 일본 수화처럼 손바닥을 아래서 위로 뒤집는 것으로 표현하도록 바로 잡기에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한번 붙인 습관이나 버릇은 평생까지 가는 법이니까 이미 전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당연시하듯 사용되고 있는 ‘그러나’ 수화를 일본식으로 ‘되다’와 유사한 모습으로 표현하도록 고친다는 것은 오히려 많은 농인들에게 혼란과 불편을 야기할 수 있으니 아예 안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제 억압이나 질식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그 수화를 온갖 부조리나 폐단을 뒤엎어서 새롭게 출발하자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많은 농인들 사이에 통할 수 있다면 농사회의 미래는 전혀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낙관해보고 싶다.


-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 -


 워렌 비티와 페이 더나웨이가 출연한 유명한 영화 제목과 동일해서 바로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나보다 하고 섣불리 예단하고 읽으면 낭패를 당한다. 이 제목은 바로 우리 농인들의 슬픈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에는 동사 어미 변화라는 것이 있다. 어미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영어 같은 유럽 언어들에서 볼 수 없는 한국어 문법의 특징이다. 동사 원형인 ‘하다’에서 미래 시제를 나타내는 ‘겠’을 넣어서 ‘하겠다’로 하면 ‘하다’의 미래형이 된다. 역시 미래를 시제를 나타내는 어미 ‘∼ㄹ 것이다’를 적용해서 ‘할 것이다’로 하면 ‘하다’의 미래형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한국수어는 어떤가? 동사의 시제를 나타내는 수화가 있는가 하면 답은 ‘그렇다’이다. 과거형일 경우 동사 수화 다음에 ‘끝나다’ 수화를 덧붙이면 된다. 예를 들어 ‘보았다’라는 단어를 수화로 표현하려면 ‘보다’ 다음에 ‘끝나다’ 수화를 하면 된다. 현재형의 경우 그냥 동사 수화 하나만 하면 된다.


 그러면 미래형 동사를 수화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불행히 미래를 나타내는 수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제법 유식한 자라면 동사 수화 다음에 ‘아마’ 수화를 덧붙이는 것으로 그 동사 수화의 미래형을 나타내는 요령을 발휘할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농인들은 많지 않고 대개는 미래형 없이 그냥 동사 수화를 함으로 현재인지 미래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미래를 나타내는 부사를 넣음으로 그 동사수화가 미래형임을 완곡하게 암시해주는 단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농인들은 동사의 미래형을 수화로 표현할 때 미래 시제를 나타내는 수화를 생략하는 경향이 많다는 사실은 농인에게 있어서 미래가 그리 중요한 시제가 아님을 강력히 시사해주는 것이다. 즉 한국 농인들에겐 과거형, 현재형이 중요하지 미래형은 아닌 것이다.


 굳이 미래형을 표시하려 해도 고작 하는 표현이 위에서 보듯이 동사 수화 다음에 ‘아마’ 수화를 덧붙이는 것으로 해결할 뿐이다. 여기서 ‘아마’는 “확실히 단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긍정적인 의미로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는 뜻이 내포되지만 쓰기에 따라 불확실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가능한 어휘이기 때문에 농인들에게는 미래는 불확실 그 자체로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많은 농인들에게는 비젼이 별로 없다. 말하자면 꿈이 없는 것이다. 나도 또한 그랬다. 적어도 서울농아학교 초등부 6학년 졸업할 때까지는. 중등부 1학년으로 진학할 때 수업 시간에 직업보도 시간이 있어서 졸업 후 직업 전선에 진출할 때 도움이 되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농인들에게 적합한 기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남학생의 경우는 양복, 양화, 목공, 인쇄, 원예. 여학생의 경우, 양장, 수예, 이렇게 두 가지 기술을 택일해야 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양복점을 운영하고 계셔서 나는 당연히 양복점을 물려받아 대를 이어 가업을 지키는 것이 순리인 줄로 확신했고 주저 없이 원하는 기술을 고르라는 질문이 들어있는 항에 양복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했지만 뜻밖에 어머니가 제지하셨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어머니는 설명하시기를 “주해야, 너는 그냥 양복이나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서는 안된다. 너는 보통 농인들보다 뭔가 나은 일, 큰 일을 해야 된다.”라고 하셨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 동자승처럼 앳되어 보이는 중등부 1학년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안된 상태여서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양복점 하시는데....”하고 어머니의 뜻을 꺾으려고 안간 힘을 썼지만 어머니는 호락호락 넘어가실 분이 아니셨다. “절대로, 절대로 양복을 할 생각을 말라. 어머니가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냥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것이 어머니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면 원하는 직업 기술을 묻는 항목에 어느 기술을 선택해야 하나요?”하는 나의 물음에 어머니는 인쇄를 선택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기를, “그렇다고 내가 너를 인쇄공으로 만들려고 인쇄를 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명심하거라. 인쇄를 택한 것은 인쇄라는 직업의 성격상 원고를 많이 읽어야 하는데 이것이 너의 문장력과 어휘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너를 인쇄부에 넣는 것일 뿐이다. 행여 졸업후 인쇄공으로 일하겠단 생각을 버려라.” 하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타의반으로 인쇄 기술을 택해서 고등부 졸업까지 6년이나 연마했지만 졸업 후 인쇄공으로 취직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어머니의 원대한 꿈이나 비젼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국 장로교 최초의 농인 목사가 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 뻔했고 영락농  아인교회의 담임이 되는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책을 집필하고 여러 곳에 농관련 이슈에 대하여 강연하고 기고문을 써서 보내어 농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개선에 기여하지 못했을지 모르고, 지금 한국에서 아마 유일한 농인 블로거로 활동할 수 없었을지 모를 터이다. 요는 우리 어머님께는 나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비젼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성공은 어머니의 비젼 덕분이라고 어머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보통 농인들을 보면 과연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이 있는가? 아닌게 아니라 그들에겐 미래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꾸준히 미래에 대비하는 노력이 없고 그냥 현실에 안주하거나 현재에 집착하는 근시안적인 삶의 스타일로 말미암아 찬란한 미래를 설계하고 창조하는 성공적인 삶을 실현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동란 후 남한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된 미군들을 상대로 그림이나 생활용품들을 판매하는 농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동두천, 의정부, 이태원, 송탄 등지에 소재한 미군부대에 몰래 잠입해서 미군들을 상대로 때로는 익살스러운 제스츄어로 때로는 스스로 농인임을 강조함으로 환심과 동정을 사는데 성공하면서 가져온 물품들을 전량 매진시킬 정도로 호황을 구가했다고 한다. 이들에 의하면 그렇게 해서 한달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웬만한 집을 한 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선배들이 미군들을 상대로 부자 부럽지 않게 벌어들인 두둑한 달러를 갖고 무엇에 썼는가 하면 우선 술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한 번 하는데 오늘 하루 벌었던 돈이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동나도 아쉬워 하기는 커녕 내일 또 미군 부대에 가서 물품을 팔면 돈을 얼마든지 만질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면서 짐짓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배들은 미군 부대에 몰래 들어가서 미군들을 상대로 엄청난 달러를 벌어들였건만 이들 중에 나중에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미군 감축으로 인해 예전 같은 호황을 누리지 못하고 삼엄한 감시와 단속으로 인해 돈벌이가 예전 같지 못하게 되자 속속 은퇴하여 대부분 노후를 어렵게 보내면서 세상을 하직하거나 인생무상을 곱씹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숨과 원망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이들에게 문제는 내일이 없다는 것이다. 내일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한 댓가가 이처럼 뼈아팠던 것이다. 아마 내일에 대한 대비에 철저하지 못한 농인들의 근성은 당시 먹고 살기에 급급했을 정도로 여유가 없던 어려운 상황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들에게 내일을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아킬레스의 건과 같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선배들을 보면 술꾼이 너무 많다. 술에 절여 사는 모습을 보면 이들에게 밝은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렇게 선배들은 내일을 위해 근검절약할 줄 아는 지혜를 갖지 못하고 그저 답답하고 고달픈 처지를 잊으려고 흥청망청 술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늦게 귀가하는 것을 일과로 삼다시피 했다. 결국 이들은 삶을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개척하지 못하고 그저 동물적인 본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하나 둘씩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들에게 찬란한 내일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도 못한 채.


- 강주해 목사님과의 서면 인터뷰 - (4차분)

 

박창후> 미국 농인 갈로뎃 대학교(Gallaudet University)는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한 농인 대학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외적으로는 꽤 그럴 듯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대내적으로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있는지요? 예컨대 삼류 취급을 받거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라도 좀 있는 건지요? 갈로뎃 대학교 출신으로 미국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케이스가 얼마나 되시는 지요?


강주해 목사님> 갈로뎃 대학교는 세계에서 유일한 농인을 위한 인문계 대학입니다. 물론 시설이나 교수의 질, 그리고 연구 논문 실적 등을 종합할 때 청인 대학교보다는 다소 떨어집니다. 시사 잡지에 해마다 미국내 대학교의 랭킹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갈로뎃은 100위권에도 들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80%가 농인이기 때문에(20% 청인 학생들은 대학원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에만 등록이 허용됩니다) 아무래도 청인 학생들이 갖지 않는 핸디캡(청력 상실로 인해 언어습득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는)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만만치 않은 댓가를 치러야 하는 핸디캡을 고려할 때 농학생이 청인 학생보다 뛰어난 실력을 과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갈로뎃 대학교가 미국의 소위 아이비리그 대학들(하바드, 예일, 프린스톤, 등등)과 견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럼에도 농교육학이나 농학(Deaf Studies) 그리고 미국수어학(American Sign Language) 등등 농 관련 학문에 있어서는 갈로뎃 대학이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세계 어느 나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유럽 농 관련 학자들도 갈로뎃 대학이 갖고 있는 방대한 농 관련 장서와 자료들 때문에 연구를 위해 많이 찾아옵니다.

갈로뎃 대학 출신 농인들 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다수 있습니다. 특히 농인 박사들 중에 갈로뎃 출신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농학교 농인 교사들도 갈로뎃 대학 출신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갈로뎃 대학 출신으로 카나다 국회의원을 한 농인이 있는데 지역구에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의원이 아니라 비례대표제로 선출된 의원이라는 사실이 옥의 티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갈로뎃 대학 출신으로 대학교 총장이 된 킹 죠던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갈로뎃 대학 사상 최초의 농인 총장으로 기록된 사람입니다. 갈로뎃 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대학에서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는 갈로뎃 대학 출신 농인 동문들이 많이 있고요. 갈로뎃 출신으로 농학교 교장이 된 이들이 많이 있는 것도 갈로뎃 대학의 저력이라 할 만합니다.

제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갈로뎃 출신으로 미국 정부 기관에서 활약하는 농인들이 다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아는 후배가 중앙정보부(CIA)에 근무하고 있는데 연봉 10만불 이상 받습니다. 그리고 재미동포로 갈로뎃 대학을 나온 젊은 여성이 FBI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아마 제인 리인 것 같은데 FBI는 연방수사국으로 영화에 많이 나오는 권위 있는 범죄 수사기관으로 꼽히는데 거기서 농인이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 경탄스럽습니다. 물론 그 농인이 직접 수사를 지휘하는 것은 아니고 수사 관련 정보를 취급하는 일을 하는 사무직입니다만 수많은 청인 직원들 사이에 끼여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공에 따라 생물학 연구원, 회계사, 변호사, 화학연구원 등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농인들의 주류 사회의 성공적 진출에 관한 한 한국과는 하늘과 땅 만큼 엄청난 격차가 나는 선진국다운 면모를 보이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박창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인데요. 서울농학교가 청와대 근처(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현직 대통령들로부터 한번도 공식적인 방문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작 선거를 위해 서울농학교 강당에 투표를 하고 나온 게 전현직 대통령들의 꼴사나운 풍경이었습니다. 그들은 농학생들하고 어울리거나 그런 건 한번도 전혀 안했습니다. 수화를 바라보는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들의 의식 수준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이었습니다. 전현직 대통령들은 왜 농학교 공식적 방문을 기피하는지 그건 곧 한국사회의 정신질환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수십년 전, 신앙심이 깊으신 어떤 아버지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방안에서 기도한 아들의 이상한 목소리라고 정확히 쓰지 않고, 농아자의 이상한 목소리라는 단어로 둔갑시키면서까지 애매모호한 표현기법을 구사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씁쓸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끄러워서 이러한 표현기법을 구사한 거라고 그때 판단했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장애에 대해 매우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이라는 데에 대체적으로 동의하시는 편이신가요?


강주해 목사님> 개인적으로 대통령들을 만나서 그들의 장애인관에 대해서 살펴보지 못한 가운데 뭐라고 논평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대통령들이 농인들에 대해서 기피증이 있다기 보다는 농인들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낮아서 농인들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가지지 못한 데서 연유한 문제라고 분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포천에 있는 농인 가구공장에 방문하여 농인 기능공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고충이나 민원을 직접 청취하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TV에서 보도되었습니다. 교육부에서 대통령에게 농학교 방문을 주선해주면 농학교 방문이 성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과연 대통령이 빡빡한 일정을 쪼개서 농학교를 방문할 정도로 농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초등부 1학년이었을 때 윤보선 대통령이 농학교에 직접 찾아오셔서 시찰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제가 몇몇 초등부 아이들과 함께 윤 대통령 발치에 앉아서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 다음에는 육영수 여사의 방문이 있었고 그 후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하기 위해 농학교를 찾은 것 외에는 시찰을 목적으로 한 방문이 한 건도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농학교는 국립농학교입니다. 국립이기 때문에 졸업식 때 대통령이 직접 나와서 축사해주면 좋겠지만 대통령의 빡빡한 일정을 고려할 때 희망사항으로 치부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졸업장에 대통령의 서명을 함께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로뎃 대학의 경우 대통령을 최고 후견인으로 한다는 규정이 아브라함 링컨 때부터 확립되어 졸업장에 대통령의 서명을 반드시 넣도록 되어 있습니다. 갈로뎃 대학은 아이비리그 대학들보다 질적으로 우수하지 못하지만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있는 졸업장 덕분에 마치 권위 있는 대학이라는 심리적 효과를 유발시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한국은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업보와 인과응보를 주요 교리로 가르치는 불교와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지 않는 유교 때문에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120년전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 변화에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역사를 고찰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불교와 유교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장애인에 대해서 편견적인 부당한 태도가 일반인 의식에서 완전히 청산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상류층 인사들 가운데 출세에 지장이 될까 하는 우려 때문에 그리고 장애인 자녀를 두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수치감 때문에 농자녀를 애써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이해될 여지가 있는 일입니다. 건전한 장애인관이 확립되지 않는 한 이런 현상은 절대로 불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자폐아를 아들로 둔 법무장관이 자기 자식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언론에 밝히고 장애인 부모들에게 장애인 자녀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 법무장관의 아내가 미국 장애인 인권과 복지를 위해 정력적으로 뛰어다니시는 것을 제가 직접 만나 두 눈으로 확인한 바 있었습니다. 참고로 1990년인가 1991년에 발효된 미국장애인법이 부시 대통령에 의해 서명되었을 때 그 법무장관이 옆에서 지켜보았을 정도로 장애인 아들에 대한 그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이 지대한 바가 있었습니다. 장애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건전한 장애인관 형성과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남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건전한 장애인관에 자극받아 타 종교들도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지원에 힘을 쏟기 시작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한 두 세대 후면 장애인 자녀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숨기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싶습니다.



박창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갈로뎃 대학교가 있습니다. 최초로 보이는 아시아인으로서 목사님께서 이 대학교 교목을 수년간 맡으셨는데 갈로뎃 대학교가 전현직 대통령들의 공식적인 방문이 있었습니까? 미국 사회가 갈로뎃 농인 대학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현지에 정통하시니까 한말씀 좀 해주십시오. 한국사회로 치면 웬만한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급은 아니더라도 서울에 소재해 있는 대학교 수준이신가요? 아니면 지방대 수준이신가요? 즉 갈로뎃 대학교의 네임밸류는 미국사회에서 어떤 수준으로 통하고 또한 학문적으로 어떤 수준에 놓여 있는지 궁금합니다.


강주해 목사님> 제가 갈로뎃 대학에 오래 몸담아보지 못해서 전 현직 대통령의 공식 방문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갈로뎃 대학의 최고 후견인(patron)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갈로뎃 대학이 사립대학임에도 농학생들이 공부하는 대학이라는 특수성을 인정해서 국가 예산 지원을 합법화할 수 있는 장치로 자신을 최고 후견인으로 한다는 대통령령에 서명함으로 갈로뎃 대학이 지금까지 계속 미국 대통령을 최고 후견인으로 모시는 행운을 누려왔습니다. 다른 사립대학에서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참으로 파격적인 조치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졸업장을 보면 반드시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1991년에 받은 갈로뎃 대학원 농교육학 석사 학위를 보면 당시 대통령이었던 죠지 부시(아버지)의 서명이 있습니다. 장진석 교수의 경우 2005년인가 2006년에 졸업했으니 아들 죠지 워커 부시 대통령의 사인이 그 학위에 들어있을 것입니다.


갈로뎃 대학 이사회를 보면 이사 중에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이 각각 한 사람씩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갈로뎃 대학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겠지요.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농인을 위한 대학을 가진 나라입니다. 일본에 쯔꾸바 공과대학 안에 농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만 청인 대학의 부속학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 갈로뎃 대학은 농인을 위한 대학답게 학부 학생들을 전부 농인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석사 박사 과정의 경우 청인 학생의 입학을 허용한다는 예외가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갈로뎃 대학의 지명도는 생각보다 높은 편입니다.

전에 제가 미국 유학 가기 전 서울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할 때 미국 영사에게 갈로뎃 대학에 가고 싶으니 비자를 허락해달라고 하니 그 영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쉽게 허락해주더랍니다. 그 때는 1977년이었어요. 그만큼 갈로뎃 대학은 영사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특히 1988년 3월에 와싱턴 디시를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미국 전체를 흔들었던 저 유명한 Deaf President Now!(이제 농인 총장이 나올 때가 됐다!) 시위운동 덕분에 갈로뎃 대학이 미국의 매스컴에 타게 되었고 그 시위운동이 성공하면서 마침내 학생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농인 총장이 탄생하자 더 더욱 신문이나 방송에 널리 보도됨으로 갈로뎃 대학은 일약 유명한 대학으로 많은 미국인들에게 각인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행운을 낚았습니다.


농학생들의 실력은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에 견줄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농인이 안아야 할 핸디캡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권투나 유도나 역도 같은 격투 경기에서 헤비급 선수가 라이트급 선수와 대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극히 드문 경우지만 농인의 몸으로 아이비리그 계통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말 그대로 극히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농학생들의 실력을 감안해서 저는 갈로뎃 대학의 수준이 지방대학의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농사회의 입장에서 갈로뎃 대학은 뭐니 뭐니 해도 농학생들을 위한 엘리트 명문 대학이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상존합니다. 이러한 네임 밸류가 농학생들의 취업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미국은 칭찬에 아주 후합니다. 실력 면으로 볼 때 아이비리그 명문대에 견줄 형편이 못되어도 농인의 몸으로 대학에 나왔다는 사실에 후한 점수를 주는데 인색치 않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무조건 1등이 아니면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는 환호하며 우러러 보지만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딴 선수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감안할 때 미국 어느 누구도 갈로뎃 대학이 실력 면에서 지방대 수준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는 일이 없습니다.


박창후> 갈로뎃 대학교를 나온 한국 농인들은 한국에 와서 활약한 사례가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서 갈로뎃 대학교 유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미국에 안착하거나 아예 영주권을 얻어서 미국인이 되어 버린 사례가 수두룩합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사회가 아직도 그들을 받아들일 만한 때가 아니라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들은 어렵게 가서 정말 어렵게 공부했는데 공부한 보람이 느껴지기는커녕 고국을 원망하거나 그리워하면서 타국에 여생을 마감하게 하는 이러한 비극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주해 목사님> 갈로뎃 대학에 진학한 최초의 한국인인 조경건 박사의 경우 졸업한 당시 한국의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 보았자 자신을 받아줄 곳이 막연하기 때문에 그냥 미국에 눌러 앉은 케이스입니다.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마냥 그를 탓할 수 없습니다.


요즘 한국의 눈부신 경제력 신장 덕분에 장애인들의 취업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 농인들이 와서 자리를 잡기에는 여건이 아직 무르익지 못한 감이 있습니다. 이들이 영어를 제법 구사할 만큼 능력을 갖추었어도 과연 한국 어느 농학교에서 그들을 정식 교사로 받아줄 수 있을까요? 한국 농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려면 국가에서 시행하는 교사 자격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과연 이들이 그런 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있을까요? 설사 자신이 있다 해도 외국에서 취득한 학위를 과연 국가에서 인정해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불가불 한국의 특수교육학 대학원에 들어가 2년 더 공부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오겠습니까? 이렇게 국가에서 외국에서 공부한 농인 인재를 과감히 영입해주지 않는 한 이들이 귀국한다 해도 좋은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귀국의 절실한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써 다행히 저를 받아주는 교회가 있었기 망정이지 만일 그런 교회가 한국에 없었더라면 한국에 못 올 뻔했을지 모릅니다.


또 한 가지, 미국에서 공부한 농학생들 중에 한국어 구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 이들로 하여금 한국행을 주저하게 만든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는 동사나 형용사의 어미변화가 심하고, 조사의 활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농인 입장에서 한국어를 배우기보다는 영어를 배우는 것이 더 쉽지 않겠나 하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비교할 때 농인들의 취업 사정에 관한 한 미국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 농인들이 미국에 정착해 산다고 해도 비난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창후> 갈로뎃 대학교를 나온 정훈 선배나 안정선 씨가 한국에 와서 갈로뎃 대학교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온 건 어쩌면 대학생활 즉 유학생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나머지, 졸업하고 나서의 진로에 대해 한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정작 홍보해야 할 갈로뎃 대학교 관계자들은 한국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고, 한국 농인 유학생들이 갈로뎃 대학교를 홍보하는 건 어떻게 보면 갈로뎃 대학교 관계자 대신 총을 매는 것 같아보여 꼴사납기도 합니다. 짧게 생각해보면 외화낭비이요, 넓게 생각하면 유학을 통해 세상 좀 넓게 보라는 좋은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갈로뎃 대학교 홍보는 한국사회의 벽을 허물어 뜨리기는 커녕 유학이라는 현실적 도피에의 악순환에 자꾸만 빠져들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한국사회의 벽은 그대로 두고, 갈로뎃 대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또 졸업하고 그러면서 미국 사회에 정착하는 게 정녕 한국 사회에 어떠한 실질적인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지 저로서는 솔직히 판단이 잘 안 섭니다. 지금까지 갈로뎃 대학교를 나온 한국농인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에 와서 활약하지 못했습니다. 대개 미국사회에 아주 정착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갈로뎃 대학교를 나온 장진석 씨가 천안 나사렛 대학교 수화통역학과 전임교수로 활약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나머지는 미국에 거의 전부 있습니다. 갈로뎃 대학 유학은 또 다른 현실도피의 달콤한 이름이나 희망이 안 보이는 한국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주해 목사님> 갈로뎃 대학 졸업 후 취업률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저는 갈로뎃 대학 홍보에 대해서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친구들 특히 아시아계 친구들 중에 취업에 실패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말레이시아 친구는 텍사스의 작은 대학에서 수학과를 가르치고 있고 인도 친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고요. 싱가폴 친구는 역시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계 친구들도 졸업 후 미국에 정착해서 괜찮은 직업을 갖고 잘 살고 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 활동하는 사람은 일본이 많고 다음이 홍콩입니다. 대만에서는 한 사람이 교사로 활동 중인데 이는 대만에서 미국에서 취득한 학위를 인정해주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전공에 따라서 귀국해서 일하는 게 유리한지 아니면 미국에 눌러 앉아 일하는 게 유리한지 다를 수가 있지요. 모국의 농인들의 취업 사정이 유리하다면 아마 많은 한국 농인들이 미국 유학 후 귀국해서 활동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한국 농인들이 고백하는 사실인데 미국에서 1년 이상 살다 보면 한국보다 미국에 더 살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낄 정도로 미국의 생활수준과 생활환경 등등 많은 것이 한국보다 훨씬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특히 자녀 교육에 관한 한 한국보다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 이민을 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자녀교육을 꼽았을 정도입니다.

만일 박사 학위를 취득한 농인이 있을 경우 호조건으로 그를 한국에 스카웃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야 한국 농사회에 자산이 될 것입니다.


미국은 우수한 외국 인력을 영입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수한 인력을 많이 확보해야 국익이 그만큼 증대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우수한 농인 인재 영입에 소극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농아인협회에서도 농인 인재를 영입할 재정적 능력이 구비되어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수한 농인 인재를 활용할 능력도 여건도 성숙해 있지 않는 한국의 상황이 마냥 슬프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단장의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한국 농사회의 구석 구석을 살펴보면 의외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농인들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들 인재를 활용할 줄 모르는 한국 농사회의 무능에 얼마나 실망하고 슬펐는지 모릅니다. 이들을 보면 저는 마치 죄를 지은 느낌이 듭니다. 제가 무능해서 이들을 양지로 끌어올려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으로는 한국이 취업이라는 차원에서 장애인을 우대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박창후> 장진석 교수님과 안영회 교수님께서 현재 천안 나사렛 대학교 수어통역학과를 가르치고 계시는데요. 두분 다 교수 신분으로 수어통역학을 가르치고 있는 반면, 이종민 씨가 유학생 신분으로 농교육학을 전공하고 있어서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저번 인터뷰에서 말씀해주셨는데요. 혹시 알고 계실 지도 모르겠지만, 세 분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굳이 세 분의 예를 들 것도 없이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좀 성공했다는 농인의 뚜렷한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구화 잘 한다는 점입니다. 장진석 교수님께서 입모양은 매우 정확하고 발음도 매우 좋은 편에 속합니다. 특히 안영회 교수님께서 정확한 발음을 내고 계십니다. 이종민 씨도 말 꽤 잘하는데요. 목사님께서 90년대에 비해 점차 수화와 구화 둘 다 정확히 구사하시려는 변화가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가장 자연스런 언어는 농식수화라는 걸 충분히 잘 알고 계시는 목사님께서 왜 굳이 구화를 익히셔서 수화와 구화 둘 다 구사하시려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신지요? 93년 10월경 칼빈의 예정론을 강의하신 목사님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수화를 구사하시는 동안 가끔 구화도 쓰셨는데, 16년이 흐른 올해 8월5일 CGNTV 방송에서 목사님께서 수화와 구화 둘 다 동시적으로 쓰시는 변화가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목사님께서 한국 사회에서 말 잘한다는 농인을 우대하고 있는 고약한 풍토에 굴복하신 것으로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강주해 목사님> 장진석 교수, 안영회 교수, 그리고 이종민 선생은 어릴 때 일반학교에서 청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신 분들입니다. 장진석 교수는 원래 서울농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초등부 5학년인가 6학년 때 일반학교로 전학한 케이스라는 점에서 다른 두 분과 차이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청인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화 구사 능력이 우수한 것은 하등 이상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어릴 때 형성된 습관이나 버릇이 성인이 된 후에도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까. 이들이 뒤늦게 농사회에 합류하여 성공적인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구화와 수화 병행 표현 방식을 문제 삼는 것 같은데 이들의 성장 배경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신기한 것은 사람마다 개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비슷해보여도 지문이나 DNA를 보면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그만큼 사람마다 개성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요. 개성이 다른 만큼 사람들에게 획일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성향이나 취향이 저마다 있습니다. 이들이 지나온 성장 환경을 생각할 때 이들의 구화와 수화 병행식 표현이 눈에 거슬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획일성이 다양한 문화와 사회를 지향하는 현 시대의 풍조에 역행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저의 문제인데요. 제가 성남농아교회에서 행한 칼빈 예정론 강의에서 구화가 많이 구사되지 않은 것은 다행히(?) 성남농아교회 교인들이 청인이 없고 거의 전부가 농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청인 교인들을 위해 제가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청인들이 끼여 있을 경우 이들을 의식해서 저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문장식 수화표현이 되어버립니다. 농인들 입장에서 만족스러운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불만을 제기한 농인이 없는 것은 제가 농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확하게 수화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덕분이 아닐까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말과 수화를 동시에 구사하는 습관이 있는 것은 제가 영락농아인교회 전도사로 시무할 때 담임 목사이신 문영진 목사님의 지시 탓입니다. 당시 청인 교인들이 제법 많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 한국수어에 익숙치 않은 이들을 위해(문 목사 자신도 포함해서. 그 당시 문 목사의 수어 구사 능력은 ‘유창’과 좀 거리가 있었고 농식 관용수화 표현에 아직 익숙치 못한 상태였음) 말과 수어로 동시에 설교하라고 저에게 주문하셨고 담임 목사의 지시를 햇병아리 전도사인 제가 감히 거역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말과 수화를 동시에 해야 했습니다. 결국 제가 수화로 설교할 때 청인 교인들을 위해 말로 동시 통역한 셈입니다. 처음에 시도해보니 서툴러서 참 힘들었습니다. 실수를 많이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차차 도가 트이면서 이제는 아주 익숙해졌습니다. 제 솔직한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역시 순 수어로 설교하는 것이 더욱 마음 편합니다. 제가 2살 때 청력을 잃은 순 농인인데 수어보다 말에 더 익숙할 리가 있겠습니까. 웃음.

CGNTV 방송에 나온 저의 설교가 언제 어디서 행한 것인지 모르지만 아마 청인들이 함께 참석한 예배시간에 행한 설교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미 설명 드린 대로 청인들이 저의 수화 설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뜻에서 말을 동시에 하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박창후> 한국사회에서 구화와 수화 둘 다 동시적으로 사용하면 교양이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끔 하거나 이를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 팽배해 있습니다. 일부 한국 농인과 일본 농인들은 가급적이면 구화와 수화 둘 다 동시적으로 쓰기 때문에  흐름이 가끔 어색해보이기도 하거니와 자연스런 농식수화라는 언어체계 내지 코드를 교란시킨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미국 농인은 한국 농인, 일본 농인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구화와 수화 둘 다 쓰면 좋다는 평행처리가 미국 농사회의 굳혀진 대세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극소수에 머물 뿐이라면 왜 한국사회에서 구화와 수화 둘 다 써야 한다는 평행처리가 유독 힘을 얻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농식수화라는 언어체계와 우리말이라는 언어체계가 이처럼 상반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둘 다 병행처리할 수 있다는 건 결국 프로세스(?)가 둘 다 같다는, 극히 말도 안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셈입니다. 각기 다른 프로세스(?)가 한 시스템을 통과할 수 있다는 부자연스런 모양새입니다. 이처럼 부자연스런 모양새가 한국사회에서 교양이 있거나 바람직한 농인의 상을 정립하게 하는 일종의 모델을 엉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말 못하는 대다수 농인들은 평생 열등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반면, 극소수의 농인들만 구화와 수화 둘 다 동시적으로 쓰면서 얻게 된 비뚤어진 우월감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농학교 현장에서 수화와 구화 둘 다 가르치려는 교육방식이 정통으로 굳혀져 나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집에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화와 구화 둘 다 또박또박 정확히 가르치는데, 그건 수화의 자연미를 병들게 만드는 인공적인 병균입니다. 지금처럼 대다수 농인의 심리를 위축시키게 만들고, 극소수 농인을 기살리게 만드는 언어방식(병행처리) 즉 구사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주해 목사님> 구화와 수화를 동시에 하는 것을 가리켜 미국에서는 simultaneous communication(약어:심컴)이라 합니다. 보통 농인들이 구사하는 진정한 의미의 한국수어에서 다소 일탈한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국어 문장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표현하는 경향이 있어서 문장력이 우수하지 못한 보통 농인들이 쉽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칠맛 나는 농인 특유의 정서나 애환이 녹아있는 관용 수화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제약을 느끼게 한다는 점도 심컴의 치명적 단점으로 꼽을 수 있지요.


그럼에도 저를 비롯하여 일부 유식층 농인들이 심컴에 가까운 수화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첫째, 수어 어휘가 한국어 어휘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청인들의 입장에서는 심컴에 가까운 표현이 더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학술적인 내용이 들어있는 학술 발표나 공식 모임이나 행사에서 발표되는 격조 높은 연설이나 강연이나 축사 등등은 역시 심컴으로 하는 것이 통역사 입장에서 쉬울 것 같습니다. 제 경험상 순 한국수어로 학술 논문이나 강연이나 연설 등을 충실하게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농인끼리 모여 있을 때에는 한국수어로 표현하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의 체험을 비추어 볼 때는.


미국에서는 왜 농인들이 순 수어를 구사하지 않고 형편에 따라 심컴 비슷한 표현을 구사하느냐 하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 논문에 의하면 농사회 혹은 농문화에 대한 보호 본능에서 비롯된 자기 방어 혹은 자위(自衛) 행위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좀 더 부연 설명한다면, 청인들한테 농문화나 농사회가 무방비적으로 노출되고 침범 당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영어 문장에 충실한 수화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청인들이 농인들끼리 구사하는 순 수어에 능통하게 됨으로 그들이 농사회나 농문화에 쉽게 진입하게 함으로 나중에 농인들이 농문화나 농사회에서조차 주도적인 지위를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일부러 청인들에게 농인 특유의 수어표현을 보여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방어기제 탓인지 제가 청인들이 있을 때는 문장식 수화표현을 구사하고 농인들이 있을 때에는 순수 수어 표현을 구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강연이나 연설이나 학술 강의 같은 경우 순 한국수어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일부 농인들이 구사하는 문장식 수화표현 형태에 대해서 마냥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제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구화와 수화를 동시에 구사하는 이들은 아마 초등부 과정이나 중등부 과정을 구화학교에서 마친 사람이거나 일반 학교에서 통합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구화에 익숙한 탓에 뒤늦게 수어를 배웠다 할지라도 구화학교나 일반학교에서 형성된 구화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물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그들의 성장 배경을 고려할 때 무턱대고 비난만 할 게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농인들이 이러한 짬뽕식 표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고수하는 이들은 농사회에서 자칫 왕따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농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 가능한 문장식 표현을 배제한 순 수어를 구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농인들은 자기 문화와 사회에 이들을 수용해줄 수 있을테니까요. 심컴 표현에 유창한 저라도 아직도 구화와 수화를 병행하면서 문장식으로 구사하는 딱딱한 수화표현을 하는 농인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농인끼리는 순 한국수어로 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만의 하나 이런 이들이 우월감 때문에 혹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화와 수화를 동시에 하는 다소 무미건조한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면 이들은 솔직히 농사회에서 환영받을 가치가 없는 위인들임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 '기술' 수화를 생각한다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확연히 느낀 점은 과학 기술이 첨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과학 기술의 세기라고 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신(新)과학 기술이 인류의 삶의 질을 급속도로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기술’ 하면 손재주를 연상하게 한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만들거나 짓거나 하는 재주나 솜씨”라고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수화를 보면 왼 손등에 오른손 검지를 두 번 두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고 미국 수화를 보면 왼 손날에 오른손 중지 끝을 두 번 붙이는 것으로 되어 있어 두 나라 수화 모두 ‘손’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수화는 좀 다르다. 오른 손을 지문자 ’ㅇ’ 혹은 지숫자 ‘10’ 모양을 해서 그 엄지 손가락 등을 이마 가운데에 두 번 붙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원래 ‘기술’은 손재주나 솜씨와 관련이 있는 어휘이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 수화에서 나타나듯이 손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 ‘손’이 아니라 ‘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왜 우리 한국 농인들이 ‘기술’을 ‘돈’과 결부해서 생각하게 되었을까?


 조국 광복 후 농인들의 삶은 기본적인 생계 유지 수준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빈한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일반 사회의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 극히 편견적이고 부정적이어서 농인들은 정당한 대우를 누려보지 못하고 차별과 경멸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농인들의 취업률이 낮았을 뿐 아니라 임금 또한 낮아서 입에 풀칠하느라 매우 고단하게 살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농인들은 좋은 직업을 얻어 잘 사는 중 상류층 청인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돈을 물쓰듯 쓰는 청인 부자들이 무척 부러웠고 상대적으로 빈곤한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고 혐오했다. 이들의 소원은 부자가 되어 여봐란 듯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부자가 되어야 농인들 자신이 일반 사회에서 멸시 천대를 받지 않고 인간 대접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부에 대한 추구를 더 뜨겁게 달구었지만 현실은 냉혹하기 때문에 농인 중에 부자가 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일부 운 좋은 농인들은 부자 부모를 둔 탓에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상속받아 제법 부유하게 사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극소수에 불과할 뿐 대개는 가난에 허덕일 정도로 생활 수준은 영세하다 못해 바닥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농인들이 양화나 양복 기술을 갖고 제법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한 사례가 발생하면서 “기술 하면 곧 돈”이라는 등식이 농인들의 의식에 각인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기술은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손재주 혹은 솜씨가 좋아야 물건을 잘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뛰어난 기술자를 사회에서 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제품을 우수하게 만들 수 있다면 청력의 유무가 큰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 고용주의 실용주의적 타산이다. 듣지 못하니까 오히려 청인보다 집중력이 좋아 작업 능률이 더 우수하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보니 양복이나 양화 계통에서 농인 기술자를 대거 고용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뛰어난 기술 덕분에 돈을 제법 만져볼 수 있게 된 농인들은 농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당연히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기술 곧 돈”이라는 등식이 농인들의 의식에 굳혀져 가다보니 엉뚱한 변질이 발생했다. 이제는 “기술이 곧 돈”이라는 등식 대신 “돈이 곧 기술”로 순서를 바꾸게 된 것이다. 돈이 많아야 기술이 좋은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을 지고의 선으로 치켜세우게 된 것이다. 가난에 한이 맺혀 있다 보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한을 풀 수 있는 훌륭한 방도로 인식이 된 것이다. 돈이 많은 것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다보니 어떻게 돈을 버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버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이 되었다.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벌었다 해도 결국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이것으로 대만족이 되고 좋게 여기며 대수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도 완전히 발본색원하지 못하고 있는 불법 모금행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보통 하루에 잘 하면 15만원을 거둘 수 있다고 한다. 한달이면 450만원이나 거둘 수 있는데 이는 큰 회사 사원 부럽지 않는 액수이다. 공장에서 뼈 빠지게 일해도 그런 돈을 벌 수가 없기 때문에 많은 농인들은 불법 모금행위에 참여하여 짭짤한 수익에 싱글벙글하는 것이다. 불법 모금행위는 문자 그대로 불법임에도 많은 농인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불법이든 아니든 문제 삼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말의 죄책감이나 수치심 그리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오늘도 번잡한 거리나 터미널이나 역에서 모금함을 들고 모금행위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뿐이랴. 날치기 강도도 마찬가지다. 은행에서 찾은 수천만원 아니 그 이상 되는 거액의 돈을 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잽싸게 강탈하는 날치기 강도를 통해서 평생 만져볼까 말까 하는 큰 돈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큰 매력을 느낀 농인들이 범죄행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범죄행위의 결말이 철창행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건마는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날치기 강도 행위에 투신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행위는 분명 잘못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수 없지만 그럼에도 농사회의 일각에서 이를 마냥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있는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단 방법이 정당하지 못해도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이를 기술로 인정하는 농인의 의식구조 탓으로 돌려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농아인협회 중앙회이든, 시도협회든 할 것 없이 회장이 임기 4년 동안 유익한 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 농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협회의 외형적 성장에 기여했다 해도 농인들은 박수를 쳐주는데 인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만일 회장이 임기 동안 돈을 여기 저기 긁어모아서 제법 큼직하게 남겼다고 하면 그들은 최고 회장이라며 박수를 쳐주고 재신임해주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기술이라고 인정하는 한국 농인들의 비뚤어진 의식구조가 빚은 기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우대하기 보다는 돈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을 기술이 뛰어난 자로 우대하다보니 많은 농인들 중에 일확천금 (농인들이 즐겨 쓰는 수화 표현은 ‘돈’+‘벼락’이다)에 연연하는 이가 많이 늘어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 강주해 목사님과의 서면 인터뷰 - 3차분


박창후> 중앙회장 한명으로 농사회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이상, 농교육 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농교육과 사회가 바꿔야 농사회도 바뀝니다. 농사회가 바꿔야 농교육과 사회도 바뀐다는 잘못된 선후관계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지 못한 건 사회적 힘의 불균형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농학교 일부 청인교사들이 농학생들에게 개인적 능력과 노력을 무리하게 요구하고, 사회도 일부 농인의 개인적 성공을 지나치게 미화시키면서 다수 농인들을 무책임하게 질타합니다. 예컨대, 한국IBM에 들어간 청각장애인이나 삼성도우미견센터에 들어간 청각장애인이나 공단에 들어간 청각장애인이나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농인하고 거리가 다소 멉니다. 일반교육의 경쟁체제에 일찌감치 눈뜬 청각장애인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공부했었고, 그 결과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한국IBM에 들어간 걸 갖고 다수 농인들에게 좀 배우라고 한 건 분명히 지적인 폭력입니다.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를 보고 다수 흑인들에게 좀 배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흑인사회에서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지적인 폭력을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반항하는 등 자기방어에 꽤 능숙한 반면(역사적으로 백인들에게 저항한 흔적들이 많았기 때문에 흑인들의 조직적 기반이 매우 탄탄합니다. 다만 경제적으로 아직도 불균등한 건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라고 봅니다) 농사회에서 농인들이 청인들에게 지적인 폭력을 당했을 때 무방비로 당합니다. 숫적인 열세도 그 한 이유였겠지만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흑인들은 백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마이클 잭슨이 백인이 되려고 십수차례 흑인의 흔적을 지우는 성형수술과 흑인차별에 대해 한마디도 절대 안한 마이클 조던의 예)과 사회적으로 성공한 청각장애인들은 농인이 아니라, 말 잘하는 구화인이라고 스스로 차별화시키려고 애를 쓰는 걸 볼 때 그 사회적 맥락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거의 둘 다 비슷합니다. 차별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순응해서 잘 살 것이냐? 대부분 후자를 택합니다. 흑인들이 선천적으로 운동감각이 크게 발달되어 있어서 스포츠계에서 집중적으로 성공하고, 농인들은 후천적으로 일반학교를 다니거나 말을 열심히 배우는 등 청인처럼 되려고 하는 게 그 사회적 의미가 좀 다릅니다. 미국생활을 오래 하시는 목사님께서 한국에 적용시키면 좋을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적극적으로 집필하시거나 제도적으로 보완하시는 등 여러 방법들을 강구하시면 좋을텐데요.


강주해 목사님> 농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했어요. 그만큼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계획하고 준비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교육문제입니다. 올해로 한국 농교육 10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 평양에 농인을 위한 교육을 실시한 지 어언 한 세기가 흘렸지만 과연 농교육이 구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는가 자문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우선 한국 농교육을 심도있게 연구하는 학자 중에 농인이 없다는 사실이 치명적입니다. 농학교에서 농학생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있는 농인 교사가 미국에 비해 턱없이 적다는 것도 한국 농교육의 장래를 위해 우려스러운 점입니다. 구화교육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가 청인 사회에서의 완전한 통합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발음과 보청기나 독순술을 통한 말소리에 대한 정확한 식별을 중시하고 있어요. 사실 발음 구사나 말소리에 대한 청취 능력은 청력을 상실한 농인에게는 쉽지 않은 능력입니다. 반면 수화를 통한 의사소통은 농인에게 매우 유효적절한 방법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이 없습니다. 양손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눈으로 수어로 표현된 내용을 정확히 시취(視取)할 수 있다는 탁월한 장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아직도 수화주의보다 구화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청인 부모들의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을 일차적으로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에서는 구화주의와 수화주의의 오랜 논쟁에서 수화주의가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여 확고한 승리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공와우 수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청인 부모들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져서 농인 자녀를 농학교에 등록시키는 대신 청인 학교로 보내는 소위 통합교육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농인 자녀를 농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애써 청인이라는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청인 부모의 비현실적인 욕심이나 기대는 농인 자녀들에게 정체성 혼란이라는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어 바람직스럽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구화학교 출신 농인들 중에 청인 사회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영락농인교회 담임 시절 뒤늦게 수어를 배워서 농인과 결혼하여 농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농인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구화학교 출신 농인들을 다수 교인으로 확보한 바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청인 사회에서의 완전 통합은 실현 무리한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합교육의 실시 덕분에 청인 사회에서의 적응이 다소 수월해지는 장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인공와우 수술 덕분에 통합교육의 효과가 배가된 것 같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부 구화인들의 성공 사례가 최근에 크게 보도되고 있지만 이는 극히 일부의 이야기이지 보통 농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아주 어리석어요. 극소수의 성공 사례에 현혹되어 다른 구화인들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속단하여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인공와우 수술의 효능에 대해서 정확히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공와우 수술이 모든 농인에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인공와우 수술을 받고 청능 훈련을 받을 경우 상당한 효능이 발생한다는 사례 연구가 있는 만큼 그 효용성을 무턱대로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그 농인이 완전히 청인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공와우 수술을 받아 말소리를 거의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도 농인은 어디까지나 농인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농문화가 존재하는 마당에 굳이 청인으로 변신을 추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불행히 많은 청인 부모는 농문화의 존재를 모르고 있거나 혹 알고 있어도 농문화에 대한 혐오나 경멸 때문에 농인 자녀를 청인으로 만드려는 무모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한국농아인협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농인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행복한 인생을 가꾸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홍보해야 됩니다.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이러한 홍보 노력에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인공와우 수술 덕분에 청인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청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해서 농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협회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구화인이 짐승도 새도 아닌 박쥐 신세가 되어 청인 사회나 농인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입니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고 있는 다문화 다인종 국가이기 때문에 농문화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그리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농문화에 대해서 아직 배타적인 것 같습니다. 결국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자랑스러운 농문화에 대해서 적극 홍보하여 농인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을 불식시키는 일이 급선무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청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농사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유능한 구화인들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 유능한 구화인들을 모두 농사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영입하게 되면 농사회는 훨씬 강력해지고 농사회를 바라보는 청인 주류사회의 인식이 훨씬 개선되고 호전될 수 있지 않겠나 전망합니다.


박창후> 일부 똑똑한 농인들은 대부분 목사가 되려고 합니다. 육체적 노동은 피하려고 하는 얄팍한 꾀가 엿보입니다. 구체적 증거는 없지만, 이러한 심증은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일부 농인 목사들이 배우자를 택할 때 청인으로 하거나, 청인 사모님을 둔 걸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는 일그러진 자부심이 곧잘 보입니다. 농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자존감을 세우기가 다소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해버립니다. 이중적인 체계, 위선의 여지가 쉽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일부 농인목사들의 아내가 청인으로 채워나가고 있는 동안, 농인목사들의 집단적 자성의 목소리가 아직도 안 나오는 건 매우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농인은 반드시 농인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그런 억지주장이 아니라, 농인 성도들을 이끌어나갈 입장이라면 청인보다 농인하고 해서 모범적 부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아존중감을 심어줄 환경적 조성이 무척 시급하다는 예로 그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청인 사모님들은 대부분 매우 좋은 사람들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체적으로 크게 보기 위해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이 글로 인해 상처를 받을 청인 사모님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똑똑한 농인들의 배우자가 농인으로 해야 하는지 생활의 편의나 사랑이 깊다면 청인으로 해도 괜찮은지 어디까지나 그들의 개인적 선택에 맡겨야 겠지요. 다만, 처음부터 농인을 배제해버린다면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집니다. 아예 배제해버린다는 건 농인 자체나 청각장애 자체가 매우 싫다는 말과도 똑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 깊은 생각이 있으실텐데요.


강주해 목사님> 후배 목사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제가 처음에 반가운 현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 농사회가 복음화될 때 농사회가 그만큼 긍정적, 건설적으로 변화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낙관적이고 소박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을 낙관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농사회 안에 발견되는 온갖 부조리들을 타개하려면 의식 변화는 물론 인성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고 이런 변화는 종교의 힘을 빌어야 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지금 보니 많은 목사들 중에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직자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종교가 부패해질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냉엄한 교훈입니다. 진정한 소명의식이 없이 남이 하니까 나도 하는 식으로 목사가 된 사람은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성직을 하나의 밥벌이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를 ‘삯꾼 목사’라고 부릅니다. 후배 목사들 중에 삯꾼 목사가 있는지 교인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삯꾼 목사’는 교인들로부터 절대로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다른 특징은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잘 공경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잘 모셔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종인데 오히려 교인들더러 목사를 잘 섬기라고 주문하는 것이지요. 상황이 거꾸로 돌아간 것입니다.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런 목사를 저는 몇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 목사 때문에 교인들이 불행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중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런 목사에게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경고입니다. 저도 목사이기 때문에 교인들로부터 존경과 대접을 받고 싶습니다. 존경을 받고 목회해야 목회가 수월해지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황금률을 보면 누구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황금률을 목회에 적용해서 교인들한테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교인들을 정성껏 섬겨주면 됩니다. 그런데 일부 목사가 이런 황금률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지 않아서 교인들의 원성을 듣고 많은 이탈이 생겨난 것을 보니 한숨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는지 의구심을 품은 때가 수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엉터리 목사의 특징으로 명예와 권세를 좋아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제가 보기에 흐뭇할 정도로 열심히 목회하여 섬기는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들이 좋아하는 그런 목사가 있어서 감사하고 대견합니다. 여기서 이름을 밝히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그런 목사가 분명 존재합니다. 저는 그런 목사를 보면 동지애를 느낍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목사일수록 겸손하다는 사실입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목사 중에 목회에 성공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을 보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시는구나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엄연한 존재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목사들은 참 진실했다고 합니다. 나라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운 바가 있었고 물질에 대한 욕심도 없고 오직 사명 하나만으로 열악한 환경과 가난을 견딜 줄 알았던 순종(純種) 목사가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기독교인의 수가 전체의 5%도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미치는 기독교의 영향력은 참으로 대단했어요. 바닷물이 짠 것은 3%의 소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 한국에 20%가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음에도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질주의와 명예주의 그리고 특권 계급주의에 물든 목사들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목사에 실망한 교인들과 사회가 등을 돌리게 되면 기독교는 농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개연성이 높아집니다.


농인 목사의 배우자 중에 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지적해주셨는데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왜 하필 청인 배우자를 택했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결정이기 때문에 제가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배우자 선택은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고 매도할 수만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어요. 예전에 이호구 목사가 청인 배우자를 업은 농인 목사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장로교 목사 중에 청인 배우자를 가진 목사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저도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농인보다는 청인에게 어드밴티지가 많이 있으니까 청인 배우자를 선택했겠지요. 하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청인 배우자를 택한 결과 오히려 목회에 마이너스 요소가 나타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 후배 목사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농인 배우자를 택한 목사 중에 이와 유사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피장파장이지만...


청인이든 농인이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속한 문제이기에 여기서 제가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청인 배우자를 택한 농인 목사의 결정을 교인들이나 다른 농인들이 곱게 봐줄 수 없다면 이미 핸디캡을 안고 목회를 해야 하는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청인 사모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방 농아교회 입장에서 오히려 유리한 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인들 중에 수어통역이 필요한 경우 청인 사모가 통역사로 섬길 수 있다는 잇점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사정상 동사무소나 병원에 가야 할 경우가 있을 경우 청인 사모가 둘도 없이 편리한 해결사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수어통역사나 사회복지사가 턱없이 부족한 지방 농아교회를 섬기는 경우 청인 사모가 더 유리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수어통역사나 사회복지사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 도시에서 목회하는 경우 청인 사모의 필요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방 농아교회 교인들 사이에 청인 사모가 환영을 받지만 도시 교회 교인들 사이엔 청인 사모가 그리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하는 듯하다는 흥미로운 대조가 성립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이 50줄에 접어들었습니다. 불혹을 넘긴 나이입니다. 어느 정도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50년 넘은 묵직한 인생을 산 사람으로 터득한 인생의 지혜를 말씀드리건대 부자가 되고 싶다면 청인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 유리하고 아기자기한 부부애를 즐기면서 살고 싶다면 농인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돈이냐 아니면 애정이냐 하는 선택에 따라 청인이냐 혹은 농인 배우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돈보다 애정을 위해 농인 배우자를 택했다고 봐야겠습니다. 하.

박창후> 농인 목사들의 숫자와 농인교회의 숫자가 많이 늘려도 농인 성도의 숫자가 옛날에 비해 많이 못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 물질적으로 크게 발달된 사회 분위기에 기인한 바가 크겠지요. 이기주의화(건강한 개인주의는 아직도 안 보입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는 사회에 대해 관심이 있는 반면, 이기주의는 사회에 대해 무관심합니다)된 농인들이 공공적 장소인 맥도널드, 롯데리아, 당구장, 농인교회보다는 휴대폰, 인터넷, 싸이 미니홈피를 통해 보이지 않는 만남과 조용한 친분으로 농인교회의 필요성이 크게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제2의 인생을 부산으로 택하시고 서울에 있는, 말 그대로 개인적 친분이 있는 서울 농인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울과 부산에 동시적으로 발전을 꾀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아니면 서울 농인, 부산 농인, 미국 농인들 복잡한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부산만을 택해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인터넷 집필활동, 부산협회 활동에 전념할 생각은 혹시 있으신지요? 노력해도 잘 안되면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농인들을 모아서 또 다른 운동, 또 다른 대안을 모색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강주해 목사님> 제가 현재 부산에서 활동 영역을 정하고 있지만 저의 지명도를 고려할 때 부산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전국 여기저기에서 강연이나 설교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일정이 중복되지 않는 한 요청을 가능한 한 승낙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제 강연이나 설교가 청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안겨주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강연이나 설교에 나서지 않는 것이 상책이겠지요. 얼마 전 충북농아인협회 직원수련회에 특강 강사로 강연을 하고 왔는데 사무총장이 참가자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저에게 사례하는 말을 듣고 강연 준비하느라 쌓았던 피로와 긴장이 기분좋게 해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과거에 강연과 설교를 위해 일본에 십수 차례 다녀본 경험이 있고 대만, 싱가폴에도 초청 받아 설교해보았기 때문에 제 활동 영역을 국내에만 국한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 저의 유창한 미국수어 실력을 활용하여 동남아에도 가서 농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고 아프리카와 남미 여러 나라에도 동일한 목적으로 방문하고 싶다는 희망이 아직도 식지 않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아직 중국에 가보지 못했거든요. 중국 혐오증이 있는 것 아니지만 제가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말라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이미 중국에 선교활동을 하시는 동료 목사들이 많은 터에 제가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싶어서 아직 중국에 가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목사가 개척한 선교지에 찾아가서 다른 목사가 애써 확보한 교인을 부추겨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도적질이나 다름 없다고 보기 때문에 지금껏 안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상석 목사, 이일 목사, 최호식 선교사, 김병택 목사 등등 중국에 단기 선교활동을 자주 하고 계시는데 이런 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분들이 혹시 저의 도움을 요청하신다면 몰라도 남들이 쌓은 탑을 가로채기 하는 얌체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어쨌든 제가 활동영역을 부산에 국한시키고 않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강연, 설교,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어디든 달려갈 수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달란트를 활용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섬기는 교회가 부산에 있는 신흥교회 농아부임을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농아부가 부흥할 수 있도록 목회와 설교 그리고 상담을 실시하는데 소홀히 할 생각이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박창후> 영락농인교회가 지원한 등대 농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건 기존 농학교들의 힘이 막강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농학교들을 극복할, 혹은 대체할 수 있다는 뚜렷한 비전과 희망은 등대 농학교가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등대 농학교가 남긴 족적은 농식 수화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농인 아이가 대안의 모범 혹은 가능성을 제시해버린 데에 그쳤을 뿐입니다.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고 농학생들에게 정신적 폭력을 가하고 있는 일부 농학교의 구화중심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을 때 “수화는 언어다”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바가 있는 중앙회가 이에 대한 뚜렷한 대처방안은 여전히 내놓지 못했습니다. 중앙회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중앙회 이사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매우 착잡했었습니다. 이들은 저보다 경험과 나이가 많으실텐데, 왜 목사님처럼 공분을 잘 불러일으키지 못하는지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결국 개인적 차이라고 봐도 될지 아니면 중앙회라는 조직 자체가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게 결정적 원인이라고 봐도 될지 그 판단은 아직도 유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이처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중요한 대화를 좀 더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많은 농인들에게 서면 인터뷰를 꼼꼼히 읽으면서 스스로 성찰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수만 있다면 저의 취지는 이미 이루어지게 된 셈이겠지요. 고맙습니다.


강주해 목사님> 저도 양흥석 전도사님과 전영희 집사님이 지도하고 있는 등대학교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등대학교의 발전과 성과를 틈틈이 지켜보고 싶었으나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거리상 어렵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양흥석 전도사에게는 제가 기도로 지원하고 있으니 상황이 어렵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를 배풀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격려한 보람이 없이 끝내 등대학교가 폐교된 것은 많은 아쉬움을 주었지만 그래도 한국 농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선사했다고 저는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등대학교의 단명은 제가 실무에 참여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아마 주변의 무관심 탓이 크다고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양흥석 전도사나 전영희 집사를 만나서 자세한 상황을 전해들으면 원인을 대충 파악할 수 있겠지만...


현재 한국농아인협회는 농교육보다는 복지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균형이 없어 보입니다. 변승일 회장은 몰라도 부회장 중 한 분이 농학교 교사 경력이 있는 분이시니 농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사하고 시정을 위해 교육부에 건의하고 항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8년이나 모국을 떠나 있는 동안 한국농아인협회 사정에 정통하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농아인협회에 대해서 섣불리 비판할 자격이 없고 그렇게 해봐야 주제 넘은 짓이라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을테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농인들의 비극은 이들이 자신들의 생계유지에 급급하다 보니 사회적 문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생계유지에 여유가 있는 농인들이라도 이들의 관심을 오락 같은 기분전환에 쏠림으로 사회적 문제에 눈을 돌리는 것을 애써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인들에게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농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 농관련 서적을 보면 무려 수천 수만권이나 되는데 거의 대부분 교육이나 수어 또는 농문화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농인 복지를 다룬 책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복지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살찐 돼지가 되느니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고요. 지금 한국은 농인들을 살찐 돼지로 만들어 가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미국 농인들은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불리워지기를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처럼 장애인 카드를 발급받아 무료 지하철 탑승, 비행기요금 50 퍼센트 할인 따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농교육에 남다른 관심과 투자가 있어서 그 결과로 많은 농인들이 성공적인 사회 참여가 가능해지고 생활수준이 비교적 향상되는 것을 보면서 언제 우리나라도 미국만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부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농교사 협회가 있어 매년 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대회가 있는지 들어보기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농인교사 친목회가 있다고 들었지만 말 그대로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으로 농교육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먹고 사는데 급하니까, 호구에 바쁘니까 다른 중요한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는 것과 생활에 여유가 있다 해도 관심을 기분전환 같은 데에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는 것이 한국 농인들의 비극이자 병폐입니다.


                             ----------------------- 다음주 4차분 계속 ---------------------- 


- 강주해 목사님과의 서면인터뷰 2차분 -


박창후> 목사님의 여러 업적들중에 교명환원만 가장 기억에 유독 남습니다. 서울농아학교에서 서울선희학교로 전격적으로 변경했을 때 지방농학교들도 전부 문교부(현재 교육과학기술부)의 방침을 따라했었습니다. 문교부의 무지와 몰이해로 빚어진 비극적 상황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습니다. 그렇게 애를 쓰시는 동안 어렵게도 서울농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언론의 무관심속에 이뤄진 성과이기에 더욱 안타까웠던 측면이 컸었습니다. 특히 문교부의 과오에 대해 아직도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점에서 과거청산하고 거리가 멀었습니다. 농인의 정체성을 상징했던 옛 교명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고향에 머물러야만 하는 지방농인들도 옛 교명을 되찾기에는 그 뚜렷한 동력과 동기가 없었습니다. 자극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설령 자극을 받았더라도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옛 교명을 되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농학교라는 교명환원운동의 성공은 서울에만 국한된 근본적 한계가 아주 극명했었습니다. 릴레이 운동으로 전국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면 좋을텐데요. 교명환원운동의 한계에 어려움이 많으실텐데요. 지금 서울농학교라는 모교를 보면 감회가 남다르실텐데요. 불행히도 최근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고 농학생들의 수치심(문닫고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달라는 농학생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과 노래를 지켜보는, 뒷자리에 앉아있는 교사들의 참관교육)을 유발하는 등 구화교육에 대한 극성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여전히 많은 폭력적 요소가 담고 있는 게 농교육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농학생이 하기 싫다는 그런 감정과 창피하다는 그런 감정을 어떻게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짓밟혀도 되는지와 어디까지 정당화시켜도 되는지 하는 그런 문제의식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교명환원운동의 성공은 곧 농교육의 본질까지 바뀔 수 없었다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농교육에 대해 할 말이 많으실텐데요.


강주해 목사> 우선 정확하고도 예리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서울농학교 교명 복원 운동이 성공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김삼찬 교장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지요. 제가 처음에 동창회의 교명 복원을 열망하는 뜻을 담은 청원서를 교육부에 보내면 쉽게 승인이 날 줄 알았을 정도로 순진했어요. 하지만 교명 복원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교장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두분인가 세분 교장에게 동창회의 뜻을 전달하고 협조를 부탁했지만 이들은 교육부로부터 문책을 당할까 두려워서인지 교명 복원에 소극적이었어요. 그런데 농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으셨던 김삼찬 선생이 교장이 되면서 상황은 바꾸었어요. 우리 동문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여 주시고 마침내 교육부에 교명 환원을 청원했더니 승인이 나오더라고요. 2001년 제가 미국에 가기 전에 이런 희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참으로 홀가분하게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이듬해 3월1일 총동창회 정기 총회때 제가 일본 초청 강연차 일본에 방문하기 전 일시 귀국해서 서울에 있었지만 교명 복원이 성공하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이라고 생각해서 이들의 공을 제가 독차지해서는 안된다 싶어서 일부러 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멀리서 ‘서울농학교’라는 교패를 새롭게 달아놓은 교문을 그려보면서 감회에 젖는 것으로 만족했어요.


그런데 다른 농학교에서 교명 복원을 추진하지 않고 있어서 서울농학교 교명 복원 운동은 10퍼센트 짜리 성공이라는 자조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른 농학교 출신 동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깨닫게 해주는 실망스러운 현실입니다. 제가 서울농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다른 학교들의 교명 복원 운동에 나서면 간섭이요 월권이라고 할까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지만 서울농학교에서 모처럼 교명 환원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니 다른 학교 출신 동문들이 자극을 받아 본격적으로 교명 환원을 위해 투쟁에 나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서울농학교가 한국 최고 농교육 기관임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한국 농사회를 이끌어 가는 농아 인재를 많이 배출한 학교가 서울농학교라는 데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이렇게 뛰어난 현실 비판의식을 갖춘 동문들이 있음으로 교육부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웃기는 발상으로 ‘농’자가 생략되어 정체 불명의 학교로 둔갑하게 만드는 이상한 교명 개명에 문제 의식을 갖고 비분강개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깨어 있는 의식이 농사회를 살릴 수 있다고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다른 농학교 춣신 동문들이 교명복원운동을 추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추진하고 있다 해도 성공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참으로 실망스럽고 한심합니다. 교명이 이상한 방향으로 개명되고도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은 비판 능력이 결여한 증거입니다. 보세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정신장애인들이 여러 형태의 부조리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냥 실죽실죽 웃기나 하면서 가만히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판단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해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이 안되니까 반응이 없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다른 농학교들은 인재 양성에 철저하게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건전하면서도 예리한 비판 능력을 갖춘 농인들이 몇 사람만 있어도 교명 개명에 항의해서 서울농학교 동문회처럼 교명 복원 추진 운동을 시작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1988년에 갈로뎃 대학에서 새 총장으로 청인 여성이 선출되었을 때 갈로뎃 대학생들이 궐기해서 “Deaf President Now!"(이제 농아 총장이 나올 때다!)하면서 시위를 벌인 결과 7일만에 비운의 새 총장은 자진 사퇴하고 곧 이어 열린 새 총장을 뽑는 이사회에서 사상 최초로 농인을 총장으로 선출함으로 농학생들의 숙원을 풀어주었던 감격적인 농인들의 승리를 전 세계가 목도하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반 사회에서의 농인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고 농인을 바라보는 일반 사회의 인식은 긍정적으로 전환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농교육의 질적 개선을 위해서 일선 교사들의 각고의 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동문들의 역할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중요합니다. 비판과 제언을 통해서 농학교의 발전에 일조를 할 수 있으므로 동문회가 애교심으로 모교의 발전을 위해 지켜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한국 농교육의 문제점이 어디 한 둘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많은 것 같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구화주의의 극성과 농학교의 고사 상태 그리고 농학생들의 불만이나 고충에 아랑곳 하지 않아서 어떻게 보면 농학생들의 기본적 인권이 무시되는 듯한 농교육 현실(제가 노래방을 설치하여 농학생들의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동영상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사실이라면 확실히 문제 제기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지요)이 가능한 것은 제가 보기에는 협회나 동문회의 잘못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 단체들이 농교육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부단하게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시정을 촉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다음으로 농교육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농인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친농파 교수가 많이 임용되지 못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미국에서는 구화주의는 퇴조하고 있는데 한국의 농교육 현장에서 구화주의가 아직 끈질긴 생존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농교육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제 청인 위주로 농교육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보다는 농인들이 활발하게 농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직접 농학생들의 눈높이를 만족시켜줄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농교육 방법들을 가르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성 있는 농인들의 분발이 요구되지요. 미국에서 이종민 씨가 농교육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데 하루 속히 박사 학위를 취득해서 한국 대학에서 농인에게 유리한 농교육 이론을 가르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正), 반(反), 합(合) 이렇게 셋이 왕성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 농교육의 현장에서 정, 반, 합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예리한 비판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하는데 이런 비판의식은 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더 나은 대안 제시를 요구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뛰어난 학식 그리고 날카로운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불행히 우리 농사회에서 농인 학자가 전무한 것 같습니다. 현재 장진석, 안영회, 이주애 등등 몇사람들이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분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이종민 씨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농교육학을 전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진석 씨나 안영회 씨는 농교육학이 아니라 수어통역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 때문에 농교육학을 실질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종민 씨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고 그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농학교에서의 농학생들의 현저한 감소 현상입니다. 올해 2월 서울농학교 졸업식에서 졸업한 초등부 어린이가 단 한명이어서 여러 가지 상을 전부 휩쓸다시피 독차지해서 참으로 신기하면서 이색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협회 직원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농학교가 고사(枯死)하고 있다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습니다. 과연 동문회나 협회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는지요?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방관만 하다간 몇 년 후면 한국에 농학교가 전부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농학교의 부재는 결국 농사회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농사회가 사라지면 농인 개개인은 훨씬 열악하고 불리한 복지 환경 안에서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강요받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게 저는 솔직히 두려운 것입니다.


박창후> 목사님의 “농아인, 그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보면 한글자막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도적으로 한글자막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정비가 되어 있지만,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극히 열악하기만 합니다. 지방재정을 탓하기에는 무관심과 무지가 더 근본적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맹인들이 책읽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점자책을 발간해주는 등 그렇게 하고 있을 때 농인들이 볼 권리 즉 알아야 할 권리는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그렇게 잘 안해줍니다. 목사님께서 지방에 계시기에 그 열악함의 정도가 잘 알 것입니다. 지방방송국을 압박해야 할 지방협회들은 중앙회만 쳐다봅니다.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을려고 합니다. 중앙회의 지시나 중앙회장이 내려와야만 비로소 마지 못해 함께 움직이는 그런 부정적 모습이 지방협회의 발전을 더디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교명환원운동은 서울만 성공했다는 그런 거하고 무관하지 않습니다. 중앙회가 십보 앞서면 지방협회도 다섯보 정도 따라가야 되는데 가만히 있을려고 합니다. 지방협회의 발전방안에 대해 좋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강주해 목사> 자막 방송이 실현된지 10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지방에 가면 자막방송이 부진하다는 것은 아마 재정 문제와 무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막방송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합니다. 재정이 서울이나 대도시에 비해 현저히 취약한 지방 공중파 방송국 입장에서 돈이 많이 드는 자막방송을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충분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막방송을 기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으려면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1991년에 장애인법(American Disability Act)을 제정하여 대통령이 서명함으로 실효에 들어갔습니다. 그 장애인법 덕분에 농인들은 자막방송을 시청할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방송국 입장에서 돈이 많이 들어서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울며 겨자먹기로 자막방송을 보내야 했습니다.

제가 8년동안 미국에 살다 왔기 때문에 과연 한국에서 자막방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법적 강제가 있는지 잘 모릅니다. 아직 없다면 협회에서 자막방송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조치를 서둘러 강구해야 됩니다.


지방 협회의 소극성에 대해서 신랄하게 지적해주셨는데 저는 8년동안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 농사회에 대한 현실감각이 무디어 있는 상태라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지방 협회에 뛰어난 농인 인재가 부족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고학력 농인들이 전면에 나서서 지방 협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보일 것입니다.


박창후> 요즘 중앙회장 선거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법원에 소송을 건 사람은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농인입니다. 소송을 걸었던 농인 목사가 자기 본분을 망각했는지 아니면 주위 측근들의 부추김으로 인해 법원에 소송을 걸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명색이 목사라는 사람이 중앙회장을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내건다는 자체가 농인들의 정서에 막대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중앙회장 후보자였던 농인 목사가 압도적인 표차로 분명히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압도적 표차라는 결과를 완전히 뒤집을 수는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법원에 소송을 걸었던 건 중앙회장 개인에 대한 이미지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측근들의 개인적 복수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밖에 안 보입니다. 이러한 소모적 싸움은 대국적으로 나서서 말려야 할 목사라는 사람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니 농인 목사들의 지성에 대해 회의하게 만듭니다. 농인목사들의 집단적 지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심이 들게 만든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목사로서 이러한 불행한 사태에 대해 할 말이 있을텐데요.


강주해 목사> 중앙회 회장 선거 관련해서 법원에 회장직무 정지 가처분 소송을 내서 전국적으로 시끌시끌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아직 소송을 낸 당사자들과 대화를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솔직히 기독교인으로써 송사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저도 좋게 봐주려 해도 안됩니다. 소송을 낸 분이 목사인데 지난 2월에 화상을 통해서 회장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겠다고 저에게 언명했습니다. 저도 깨끗한 승복이 나중을 위해 아주 지혜롭고 유리한 행동이라고 동감을 표했습니다. 같은 목사라서 선전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깨끗한 승복은커녕 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상대로 회장직무 정지 가처분 소송을 내어서 제가 오히려 어리둥절합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평가하기 어렵지만 이러한 행동이 나중에 소탐대실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 농사회에서의 입지가 좁혀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어쨌든 하루 속히 소송을 낸 원고나 피고 모두 화해해서 농아인협회가 단합된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야 정부나 청인 사회에서 농아인협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이 나중에 농인에 대한 친밀감을 조성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분열은 언제나 추합니다. 목사가 한국 농사회나 협회의 분열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제 자신이 안세준 전회장의 삼고초려를 계기로 해서 협회 이사로 참여한 후에 협회 회장단과 상임이사 사이의 빈번한 갈등 때문에 회의를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현재 한국 농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자질이나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목사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따를 줄 알아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 그런 목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면 철저한 자기 부인이 아니면 쉽게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세상에 누가 원수를 쉽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미친 놈이 아니라면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자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원죄를 타고 태어난 불완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을 부인해야만 그리고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실천이 가능한 내용입니다.


목사가 자신을 부인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교회나 사회에 덕을 세워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목사의 지성이 아니라 영성입니다. 목사는 지성이 출중하지 못해도 영성이 뛰어나면 목회자 자격이 충분합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 농인 목사들의 지성이 별로 뛰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이 제 개인적으로 아쉬움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영성이 낙제점이라는 사실이 더 화가 날 정도로 불만스럽습니다. 어떤 후배 목사가 있는데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니 잘 모셔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기를 좋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구토가 날 정도로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자가 지금 종교지도자로 거들먹거리고 있어서 바리새인이 새로 등장했나 빈정거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 정도입니다.


제게는 박윤삼 목사라는 훌륭한 목사가 있어서 그분을 가까이 지켜보고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귀한 축복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윤삼 목사는 한국 처음으로 농아선교기관인 영락교회 농아부를 설립하시고 30년이나 헌신적으로 섬기신 분으로 영락농아인교회 많은 교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1992년 3월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소천하셨다) 그분은 참으로 목사다운 분이셨습니다. 겸손하고 온후하면서도 농인에 대한 사랑이 깊으신 분이셨지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헌금을 많이 내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헌금을 많이 내라고 닥달하지 않으시고 농교인들의 부담을 덜게 하기 위해 숭의여자고등학교 교목이 되셨습니다. 영락농아교회로부터 사례비를 적게 받으면서도 불평 불만을 전혀 내지 않으셨을 정도로 그에게서 욕심이나 이기심을 찾기 어려우신 분이셨다. 그분의 겸손, 헌신, 애정, 그리고 자기 희생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한 제가 어떻게 그분의 인격에 감화 받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원래 목사가 될 생각도 꿈도 꾸지 않았던 제가 참으로 이상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마치 소가 코뚜레에 꿰어서 마지못해 끌려다니듯 목사가 되었지만 목사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인식하면서 자신의 직업에 만족과 기쁨으로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 스스로 보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죄도 많은 사람입니다. “선 줄로 여기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의 경고대로 항상 넘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합니다. 이렇게 박윤삼 목사님의 뛰어난 영성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배웠고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 조심하면서 일하는 제가 그래서 많은 분들의 분에 넘치는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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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주해 목사님과의 서면 인터뷰 (1차분) -


<강주해 목사님과의 서면 인터뷰> - 박창후(농인) -


 1990년대에 최초로 농인이 직접 집필한 ‘농아인, 그는 누구인가’를 통해 농사회에 정신적 자양분을 줬던 신선한 시도가 일회성에 그쳐버린 데에 대한 아쉬움을 수십년째 접어두지 못한 저로서는 올해들어 강주해 목사님께 블로그 개설을 직접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어디까지나 농사회와의 소통이 가능해지기 위한 좋은 취지에서였다. 요즘 강주해 목사님의 발걸음이 분주해지는 동시에 발언력도 점차 왕성해짐에 따라 내 권유가 직간접적으로 그 목사님께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 점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몇 년전, 공단에 최초로 들어간 농인한테 “서면 인터뷰 비슷한 게 좀 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네가 기자도 아니면서 무슨 인터뷰”라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여기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농사회의 발전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은 심리적 장애물이라고 판단했다. 인터뷰는 반드시 기자만 해야 한다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얼마나 웃기지 않는가. 십여년전에 지승호 씨가 인터뷰라는 미개척 분야를 파고 들었을 때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직업이 기자가 아니라는 단 한가지 이유였다. 지금 공지영 씨하고 인터뷰했을 정도로 너무나도 커 버린 인터뷰 전문가(인터뷰어)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터뷰 전문가를 탄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중요한 건 발상의 전환이지 전통이 아니다.


 인터뷰 전문가나 기자를 흉내내기 위해 그 농인한테 서면 인터뷰를 제안한 게 아니라, 그 서면 인터뷰를 통해 여러 중요한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애석하게도 기자만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그 농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몇 개월전, 지방신문이 그 농인을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는데, 신문 가장자리에 그다지 크지 않는 비중으로 다루어 버린 걸 볼 때 무척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유인즉슨, 기사를 쓴 기자는 농인에 대해 잘 모르거니와, 피상적으로 관찰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문이라는 활자 매체의 한계로 일반인에 대해 지면을 인색하게 할애한 반면, 유명인한테 지나치게 할애해준 부정적 측면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기자만 인터뷰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푹 빠진 그 농인으로부터 서면 인터뷰 제안을 거절당한 뼈아픈 경험이 아직도 채 잊혀지기 전에 강주해 목사님께 서면 인터뷰를 한번 제안해보고 싶었다. 목사님이라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 분일거라는 믿음과 선의로 이루어진 취지에 십분 공감해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서면인터뷰는 메일을 수차례나 주고 받으면서 서로 내용을 확인하고 수정하는 등 전적으로 목사님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주기로 했었다. 다만 질문은 전적으로 순전히 내 의지와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박창후> 강주해 목사님께서 수십여년간 서울 영락농인교회를 시무하시다가 개인적 사유로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셨을 때, 농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바란 일부 농인들은 목사님의 갑작스런 미국행을 비판했었습니다.(솔직히 저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고국에 돌아오셔도 목사님께 대한 뒷소문만 여전히 무성했을 뿐, 그 어디에도 환영이라는 게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비판에 대해 억울해서인지 목사님의 블로그를 통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무성한 뒷소문들을 잠재우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텐데요.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와 제2의 인생을 시작하시는 등 힘겨운 행보를 후배로서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미국행을 택하지 말걸 하는 그런 후회나 무성한 뒷소문들에 대해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등 소극적 방어를 계속 택하실 건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블로그를 통해 해명하셨듯이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신가요?


강주해 목사님> 저의 미국에서의 목회 생활에 대해서는 지금도 추호도 후회가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한 덕분에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농아 선교가 조금씩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장로교 목사인 제가 과거에 한국 영락농아인교회 담임목사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서 한국에 비해 상당히 취약한 미국연합감리교 농아선교의 저변 확대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연합감리교회 농아선교위원회 위원으로 7년 섬겼으며 또한 미국연합감리교 농아총회 부회장으로 4년 섬김으로 미국연합감리교 농아선교 발전을 위해 기여한 것을 보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미국 연합감리교회 일리노이 그레이트 리버즈 연회 농아선교 총무 목사로부터 청빙 요청이 왔을 때 5년 기한으로 일하여 달라는 계약직이어서 5년동안 미국에서 일하다가 귀국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볼티모어 와싱턴 연회로부터 청빙이 오는 바람에 미국에 더 머물면서 선교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작년 11월부터 감독 목사님이 농아선교 예산 삭감을 거듭 강조하시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부담이 생겨서 제가 더 이상 일할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에 작년 12월 31일 사임을 했습니다. 당초 5년 일하다 돌아오려는 제 계획이 결과적으로 2년반이나 더 연장한 셈입니다.


무성한 뒷소문들에 대해서 차차 해명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 필요가 없습니다. 저에 대한 소문들을 들어보면 거의 90퍼센트가 사실무근이어서 해명의 당위성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서두르면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 서둘러 진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천천히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 더 의연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를 가까이 하거나 저의 동정을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은 이런 허무맹랑한 헛소문에 현혹되지 않는데 문제는 저와 접촉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헛소문에 쉽게 놀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해명은 오히려 궁색해보일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시간을 두고 주어진 일에 충실히 하다 보면 저의 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차차 저에 대한 소문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박창후> 최근 전국을 돌면서 농교회들이나 대구대학교 농인들을 대상으로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활동과 인터넷 블로그 집필을 하시는 목사님의 신념에 비춰본다면 농사회의 변화를 분명히 애타게 바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라는 직업보다는 중앙회장을 통해 농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시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목사라는 직함으로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생각이신가요? 예컨대, 인터넷 블로그 집필과 외부강연 같은 활동 말입니다.


강주해 목사님> 제가 장로교 목사라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장로교와 불가분리 관계에 있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죤 칼빈(프랑스 사람이니 프랑스식 발음으로 쟝 칼뱅이라고 불러야 옳겠지만)이 주창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해보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야 말로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뿐만 아니라 세속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그의 신념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며 그것이 제가 교회 뿐 아니라 농사회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와 지식을 활용하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게끔 하고 있지만 제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농사회나 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이따금 협회의 요청이 오면 영락농인교회 담임직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도와주는 선에 머물렀다가 1996년 안세준 전 회장의 삼고초려를 계기로 해서 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변신을 감행했습니다. 특히 한국농아인협회가 청음회관의 그늘에서 벗어나 서초동에서 살림을 시작함으로 오늘처럼 눈부신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틀을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을 무한 보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안세준 전 회장을 위해 찬조 연설을 해줌으로 결과적으로 회장 선거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안세준 전 회장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계시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나름대로 해석해보고 싶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 안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개혁주의적 사상에 따라 제가 한동안 협회 이사가 되어 협회 발전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협회 회장으로 나서는 것은 아직 고려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제가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지 협회 회장으로 일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협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교회 목사로 목회하는데 최선을 다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목사란 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잘 보살피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돈독히 함으로 어려운 세상에서 보람된 삶을 사는 지혜와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화시키는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종입니다. 그래서 협회 회장이 됨으로 결과적으로 목회 일에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불충이 되기 때문에 협회 회장직에 대한 도전은 추호도 고려해보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농인 회원들의 복지 문제를 다뤄야 하는 협회 회장직 보다는 교인들의 복지는 물론 영적 웰빙까지 취급하는 목사직이 더욱 고상하고 귀하게 보이고 모험에 가까운 도전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후회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만족하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협회 회장이 리더쉽을 발휘함으로 농사회에 발전을 가져올 수 있지만 사람의 죄성을 제거해서 건전한 인간상을 보여줄 수 있도록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지가 인간의 죄성을 제거해서 내적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없어요. 이처럼 교인들의 영적 문제를 취급할 수 있는 목회직을 무척 고상하게 여기는 제가 협회 회장직에 대해서 별다른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목회직에 대한 최우선순위를 유지하면서 틈틈이 농사회의 발전을 위해 강연하거나 이사로 협회 살림을 뒤에서 밀어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으로 주제 넘게 나서지 않고도 조용히 농사회에 잔잔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모름지기 목사는 권력이나 돈이나 여성 문제에 각별히 조심해야 된다고 저는 일찍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협회 회장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박창후> 십수여년전, 서초동에 있는 중앙회 지하 사무실에서 강주해 목사님을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인사는 했었지만 저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때쯤 인터넷 글쓰기는 아예 시작하기 전이었으니까요.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중앙회에 개입(?)하셨을 정도라면 중앙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반증일텐데요. 물론 영락농인교회를 시무하고 계셨기에 활동의 반경이 상당히 넓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허나, 지금 그때의 활동반경에 비해 다소 좁아지는 건 사실입니다. 특히 부산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농아부를 맡고 계시는 등 그때의 위상에 비해 (무척 죄송한 표현이긴 합니다마는) 많이 추락하셨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부산농아인협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중앙회로 하여금 스스로 변화할 수 있게끔 기반적 환경이나 동기를 만들어줄 생각은 없으신지요?


강주해 목사님> 영락농아인교회 담임직을 맡을 때보다 현재 농아부를 맡고 있는 관계로 위상이 추락하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고 했어요. 저는 신앙적으로 볼 때 대형 교회 담임직이든 시골 교회 담임직이든 경중이나 귀천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지방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후배 목사들을 보면 존경의 의미로 머리 숙여 인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영락농아인교회라는 대형 교회를 담임함으로 농사회에서의 제 활동의 반경이 무척 좁았습니다. 당시 교인이 매주 평균 출석이 성인 기준으로 380명이나 되었습니다. 어린이와 학생들까지 포함시키면 무려 500명에 육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회 이사로 나선 것은 모험이었지요. 다행히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사직을 대과없이 잘 수행하여 협회 발전에 공헌을 남길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까 언급했지만 제 성격은 내성적입니다. 남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심약한 사람이었고 겁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면서 내성적인 성격은 조금씩 고쳐졌지만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지요. 이러한 제 성격 때문에 명예욕이 별로 없다는 것이 저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하지만 목사가 되면서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담대하게 나서야 된다는 사명감이 제 내성적 성격을 고치는데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게으르다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나름대로 열심히 심방하고 열심히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도 열심히 준비하고 은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무척 힘이 들어서 협회 이사까지 맡는다면 탈진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잘 감당할 수 있었지요.


현재 부산 신흥교회 농아부를 맡고 보니 교인수가 30명을 넘지 않아 영락농인교회 시절보다는 훨씬 편하고 수월합니다. 그래서 협회에 참여하여 도움을 주는데 인색할 까닭이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산농아협회 수영구 지부에서 저에게 수어통역사 양성반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흔쾌히 수락했지요. 앞으로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려고 합니다. 8년동안 미국에 있다가 귀국해보니 한국 농사회에 대한 현실감각이 많이 떨어져 감히 나서기 보다는 조용히 관망하면서 현실감각을 키운 후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여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부산농아협회를 보니 인재가 부족한 탓인지 발전상이 다른 시도 협회에 비해 뒤쳐진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는가 심각히 고민하면서 그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려 합니다.


제가 비록 부산에서 출생한 사람이라 하지만 부산에서 살던 기간은 6개월 정도로 매우 짧기 때문에 부산 농사회에서의 저의 영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의 인지도도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부산 신흥교회 농아부를 맡아 목회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향력이나 인지도를 높여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 목적 없이 저를 부산에 보내주시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박창후> 수십여년간 영락농인교회를 시무하시는 등 나름대로 애정이 많고, 또한 깊으실텐데요. 영락농인교회와 관련된 여러 뒷소문(교회의 재정적 빚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미국행을 택했다는 그런 대표적 뒷소문)들이 무성했을 때 실망감과 배신감, 좌절감 등 영락농인교회 농인성도들에 대한 부정적 심정이 없지는 않으신지요? 후임자가 전임자를 제대로 모시거나 전임자의 입장을 대변해주지 못한 건 비단 정치인(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습니다)뿐만 아니라, 일부 농인목사도 닮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서울에는 농교회가 이미 포화되었기 때문에 부산이라는 고향(물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을 택하셨다는 블로그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목사님의 실망감과 배신감, 좌절감에 대해 애써 자위하려는 그런 느낌이 약간 있었습니다. 어느 누군들 서울로 안 올라가고 싶어하겠습니까? 다들 기회만 되면 서울에 가고 싶어합니다. 한국은 아직도 서울 공화국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창원에 거주한지 거의 7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러 문화적 측면이나 공간은 여전히 서울에 비하면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지방 대학교수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수가 되려고 하고, 지방 정치인들도 어떻게 해서라도 서울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을 등지고 부산을 택하신 목사님의 선택은 어떻게 보면 비장하게 보입니다. 물론 영주권이라는 개인적 이유로 미국과 부산을 계속 왕래하시겠지만요. 여기서 개인적 사정을 전적으로 존중해드리고 싶습니다.


강주해 목사님> 영락농아인교회에 분명히 제가 사임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영락농아인교회가 당시에 성전건축을 위해 한 13억원 정도 모금해서 그 중 6억원 들어 이웃집을 매입해서 성전 건축을 위한 기반 조성을 마친 상태였고 설계사에게 건축 설계를 의뢰하여 조감도를 교회 게시판에 붙여놓고 교인들로 하여금 성전 건축을 위한 꿈을 키우면서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부득이 사임하고 미국에 갈 때 성전 건축을 위해 7억 정도 확보한 상태였지요. 물론 그 돈으로는 새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교인들이 열심히 헌금해주실 것으로 믿었고 을지로에 있는 모교회 영락교회나 농아교회가 속해 있는 서울노회에서 재정 지원을 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해서 봉헌해드리기를 그토록 원하였지만 하나님이 거부하심으로 눈물을 머금고 성전 건축의 대업을 아들 솔로몬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저도 후임에게 성전건축의 영광스러운 특권을 넘겨야 하는 아쉬움으로 한 동안 멜랑콜리(상심)에 젖었어요. 하지만 성경의 기조를 보면 성전건축의 꿈을 이루지 못한 다윗이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다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 못한 모세가 후계자 여호수아보다 더 위대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사실로 말미암아 저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진심으로 성전 건축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액의 헌금을 하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이제 기도한 보람이 있어 성전 건축을 마치고 아름다운 건물이 들어선 것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후임자가 저에 대해 홀대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면이 있어서 제가 애써 이해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가 사임한 후 후임 목사가 공동의회에서 위임 목사가 되는데 필요한 3분의 2이상의 표를 획득함으로 공식으로 위임 목사가 된 이상 전임 목사가 불필요하게 교회에 방문함으로 교인들 간에 동요를 일으켜 후임 목사의 사역에 지장을 주지 말라는 의미로 저의 전임 교회 방문과 설교를 자제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연합감리교회에서는 전임 목사가 사임하면 교인들이 후임 목사의 목회 사역에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도록 6개월 동안 전에 섬기던 교회에 모습을 나타내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한 전임 교회에 대한 금족령은 6개월이 지난 후에는 해제되어 정당한 목적과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전임 교회 방문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서울 대신 부산에 목회지를 택한 것은 제가 원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온당합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목회지를 정하지 못했다고 해서 유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대형 교회를 맡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소형 교회를 맡는 것이 훨씬 더 복되고 낫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볼티모어 와싱턴 연회 청빙을 받아 2년반 동안 갈로뎃 대학 교목과 볼티모어 교외에 위치한 마고디 농아교회 담임이 되어 시무했는데 성취감이라든지 행복감을 맛보지 못했어요. 5년 후면 돌아온다는 약속대로 볼티모어 와싱턴 연회로 옮기지 않고 한국에 귀국했으면 영락농아인교회 담임직을 복직하지 않더라도 한국농아인선교회 해체 같은 수치스러운 사태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해봅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잠언을 보면 하나님은 한결 같지 않은 저울과 말을 미워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고별 설교에서 나중에 한국에 다시 돌아온다 해
도 영락농아인교회에 복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어요. 이제 와서 제 말을 번복한다는 것은 제 인격상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영락농인교회가 교인 감소로 인해 많은 이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영락농인교회가 교인 감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강 목사 책임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지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솔직히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미국에 가기 두달 전인가 임시 제직회를 열어서 제가 미국에 간 후의 교회의 장래 문제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제 사임은 확고하고 미국에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후임을 정해서 담임 목사로 모시는 것이 순리라고 보았는데 일부 집사가 5년 후에 한국에 돌아 올 것이라는 저의 발언에 주목해서 그러면 5년동안 임규현 부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지키게 하고 제가 5년을 채운 후 귀국하면 영락농아인교회 담임 직에 복귀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지만 많은 제직들이 5년은 기다리기에는 너무 길다면서 차라리 새 담임을 모시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함으로 제직의 선택이 제가 아닌 새 담임의 청빙으로 귀착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직들의 선택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직이라면 담임이 5년동안 교회를 비우느니 차라리 새 담임을 모시자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직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제 사임을 마지 못해 받아들인 교인들에게 송구한 마음으로 머리 숙여 인사하고 미련없이 교회를 하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연을 잘 모르는 교인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영락농아인교회 교인들이 감소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강 목사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저는 억울하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관할하고 계시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부산에 내려 갔다고 해서 제가 실망감, 좌절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닙니다. 아마 제 문장력이 부족해서
이러한 뉘앙스를 풍겼는지 모르지만 서울 대신 부산에 목회지를 정했다고 아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신자를 순례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순례자가 어떤 지역이나 장소에 애착이나 미련을 두어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나중에 부산에서의 목회가 성공적으로 전개되더라도 언젠가 남북 평화 통일이 되면 부산을 미련없이 떠나 북한에 가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제 부모님 모두 이북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향수랄까 뭐랄까 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실향민 2세로 생전에 통일을 보지 못하고 북한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사역에 대한 관심은 거의 숙명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 2차분 인터뷰 계속(다음주) --------------------


- '학교' 수화에서 본 농교육의 문제성 -

 지금부터 100년전 미국 감리교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 평양에서 농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설립해서 농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 한국 농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4년 후에 1913년 일본의 조선총독부에서 서울에서 맹농인들을 위한 특수교육 기관으로 ‘제생원’을 설립함으로 한반도에는 맹아학교가 평양에 이어 서울까지 두 곳이나 늘어났다. 불행히 로제타 셔우드 홀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맹아 학교는 홀 선교사가 한국 선교 사역에서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운영난에 봉착하여 결국 유명무실해졌지만 그 대타로 이창호 목사가 평양에서 따로 ‘평양맹아학교’를 1935년에 설립함으로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해방 후 북한에 신탁통치라는 명분으로 소련군이 주둔한 탓에 이창호 목사가 학교 운영권을 박탈 당한 후에는 김일성이 장악한 공산당에 의해 운영 유지되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나는 일본이 설립한 제생원의 후신인 ‘국립서울농아학교’에서 초등부부터 고등부까지 12년을 공부했다. 한국 땅에 농교육이 실시된 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여 농학교의 존재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닐 것이다. 농학교가 있음으로 무지몽매한 많은 농인들이 문자를 깨우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수어를 익힘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것이 농인들에게 사회성 함양 및 농인의 정체성 내지 자존감 확립에 기여하였다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라는 수화에 석연치 않는 부분이 발견된다. 원래 한국수화는 일본이 제생원을 설립할 때 농학생들에게 전수했던 일본 수화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일본수화가 한국수화의 뿌리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래서 양국 수화간에 공통성이 많이 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일본 수화로 ‘학교’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양손을 편 상태로 눈앞에 모은 채 두 번 전후로 움직인다. 이 수화는 마치 책을 보는 시늉을 하고 있어서 학교는 책을 보면서 공부하는 장소라는 이미지를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수화는 다르다. 어떻게 표현되느냐 하면 양손을 양쪽 어깨 위로 아니면 약간 뒤로 두 번 넘긴다. 원래 책을 눈앞에 놓고 보면서 공부하는 시늉을 하던 일본수화가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책을 보던 두 손이 어깨 뒤로 넘겨버리는 것으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문화관광부와 한국농아인협회에서 공동 주관하는 한국표준수화규범 제정 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수화어원사전’을 보면 “‘학교’ 수화의 구조는 여닫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그 어원적 의미는 (초등학생용) 책가방 뚜껑이 여닫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설명에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초등학생용 책가방은 요즘 배낭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요즘 배낭이 가벼운 천으로 구성된데 비해 초등학생용 책가방은 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해방을 맞은 1945년 후와 1950년대에 그런 가방이 유행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내가 서울농아학교 초등부에 입학해서 공부한 1960년대 당시에 그런 가방이 유행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책가방을 수화로 형상화함으로 ‘학교’라는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당시에 배낭과 비슷하게 생긴 책가방을 등 뒤에 매고 다녔는데 그 가방을 지금 ‘학교’ 수화와 동일하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가방을 매는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주먹을 쥔 양손을 양쪽 가슴에 대는 것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내가 초등부 어린이였을 당시 어느 누구도 책가방을 두 손을 어깨 뒤로 넘기는 식으로 수화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마치 책을 보듯 양손을 눈앞에 놓고 두 번 앞뒤로 움직이는” 수화에서 “어깨 뒤로 넘기는” 수화로 변한 것은 일종의 진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표현은 세월이 지나면서 약간 변할 수 있는데 ‘학교’ 수화도 예외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의 ‘학교’ 수화 표현이 주는 뉘앙스다. 원래 일본 수화는 책을 보면서 공부하는 형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도 그 표현은 바꾸지 않고 있다) 한국 농인들이 책을 보던 양손을 엉뚱하게 어깨 뒤로 넘김으로 마치 보던 책을 뒤로 넘겨 버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좋게 말하면 책을 다 읽었으니 마치 졸업했다는 듯 뒤로 넘겨버린다는 의미로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책 읽기가 귀찮아서 다시 책을 보고 싶지 않다는 제스츄어로 양손을 뒤로 넘기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어느 쪽에 해당할까? 서울농아학교에서 12년이나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나의 경험상 후자가 정확하다고 단정내리고 싶다.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농교육이 실패한 탓으로 돌려야 한다. 농학교에서 초등부부터 고등부까지 12년 과정을 다 이수하여도 실력은 청인 초등학교 3학년이나 4학년의 수준에 머물 정도로 농교육이 참담한 실패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부에 등록할 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중등부나 고등부로 진학하면서 농학교에서의 농교육의 효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음을 깨닫고 감연히 중퇴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이 농교육의 실패를 웅변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등록금 마련하기 어려워서 부득이 중퇴할 수밖에 없다는 재정적 사유도 있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당시 교사들은 대부분 일반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문교부의 갑작스런 발령으로 전근 오신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이 수어를 전혀 못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어를 배우시느라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교사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것으로 50분이 소요되는 수업 시간을 거의 떼우다시피 했다. 수업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정상인데 농학교에서는 오히려 학생이 교사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이상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인지 학생이 교사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이상한 곳이 바로 농학교였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배울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고 어떤 교사는 그냥 발음 연습을 시킴으로 수업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발음 연습이라면 몸서리치도록 지긋지긋해지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즐거워야 할 학창 생활이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듯한 지독히 재미없고 지겨운 체험으로 각인되지 않을 수 없을 만했다.


 이렇게 만만치 않은 등록금을 내고 어렵사리 들어간 농학교에서 교사들의 수어가 형편없어 그들에게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는 기대를 아예 갖지 않는 것이 나중에 겪게 될 실망감이나 허탈감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자괴감이 생기면서 그 실망감으로 중퇴하는 학생들이 속출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의 한국 농교육은 총체적 난국은 아니더라도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내가 다니던 국립 농학교에서 운동장 바닥 다지기에 학생들이 동원되어 뜨거운 뙤약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한 기억이 있었는데 사립 농학교야 그러한 사정은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의식이 있는 학생들은 우리가 공부하러 학교에 다니는지 아니면 일하러 학교에 다니는지 헷갈린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이렇게 학교에 대한 좋은 추억이 그리 많지 않은 농인들은 “에라, 학교고 뭐고 다 필요없다!” 하면서 손에 든 책을 뒤로 팽개 버리고 많은 청인 학생들이라면 석별의 정을 이기지 못해 으례 울면서 불렀다는 “잘 있거라! 학교야”하는 졸업의 노래를 부를 줄 모르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학교를 등지고 떠나간 농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학교는 비싼 등록금을 헛되이 축내는 무용지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양손을 어깨 뒤로 넘기는 수화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서울농학교 동문들의 동문회 참여율이 해를 거듭할 수록 저조한 것은 아마 모교에 대한 낮은 애착심이 작용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해방 후 한국농교육이 오랜 일제 식민 시대에서 해방된 직후 미군 군정 시대로 넘어갔다가 한국 사상 최초로 국민들의 투표로 이루어진 민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6.25 한국전 등과 같은 혼란스러운 과도기의 미숙한 양상을 탈피하지 못한 탓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농학교 교사를 위한 전문 양성기관이 부재했던 탓도 있으니 당시 공부했던 농학생들이 시대를 잘 못 만난 시대의 피해자였던 셈이다.


 현재 농교육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고등부 3학년까지 의무교육이 보장되었고 농교육학을 이수하고 수어 구사 능력이 좋은 교사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농교육의 질이 전에 비해 상당히 발전되었으리라고 긍정적으로 기대하고 싶다.

그리하여 농인들의 ‘학교’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환되어 양손을 눈앞에 두어 마치 책을 보면서 공부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본래의 수화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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